요안23세 성하의 새 회칙(回勅) 「지상의 평화」만큼 전세계의 전폭적인 환영을 받은 교황의 사회회칙은 일찌기 없었다. 각국은 다투어서 각국어 번역을 서둘으고 있다. 우리의 것도 곧 출판될 단계에 있는 줄 듣고 있다.
그런데 이 번역의 문제 때문에 약간의 논의가 일어났다. 미국의 저명한 교육가요 예수회원인 에드워드.콘웨이신부가 성청에서 공식으로 번역(英語)한 것을 못마땅하게 논평하고 개역(改譯)하라고 강조한 것이다. 국제문제의 전문가요 현재 케네디 대통령의 군비(軍備) 제한 및 축소관계의 고문인 그의 지적들에는 주목할만한 것이 있다. 그는 『그 영역(英譯)은 오역했을뿐 아니라 라띤 원문의 말들에 적당한 비중(比重)을 주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그리고 또 딴 말을 덧붙임으로 인하여 사상을 생약하여 오손(汚損)했다』고 했다. 이런 결과를 내게 된 원인은 이태리어를 그대로 영역한데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즉 라띤원문을 사용하지 않고 이태리어로부터 영어로 옮겨질 때 그런 차질을 가져온 것이라는 것이다.
가령 「하나의 공공당국(公共當局)한 것을 그냥 「세계사회」 또는 「공공당국」한 것은 그 개념을 오도(誤導)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 중대한 것으로서는 가령 라띤 원문에서 국제연합의 강화를 『나는 원한다』고만 하였다. 이런 것을 강조하는 뜻을 완전히 뽑아버린 거와 다름 없으니 꼭 맥박을 줄인거와 다를 것이 없다고 논평했다.
이런 것들을 많이 지적하고 있으나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영어와 이태리어간의 번역상의 문제인 것 같다. 콘웨이 신부의 이같은 논평에 대해 「바티깐」 국무성 당국자들은 더욱 냉정한 논평을 하고있다. 즉 영어와 이태리어간의 피할 수 없는 어감(語感)의 차이같은 것은 콘웨이 신부의 지적한거와 같이 수긍할 수 없지만 원뜻을 번의(飜意)했거나 약화(弱化)한 것은 아니라고 답변했다. 그러니까 한편 동감이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이상 비약한 생각은 그것은 지적한 사람의 오상(誤想)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쯤되면 문제는 별로 심각한 것은 없는상 싶다. 성청에서 공식으로 번역한 영어 「텍스트」는 그대로 권위있는 것으로 믿을 수 있다. 세부(細部)에 들어가서 어떤 그것을 지적할 수 있어도 그것은 번의(飜意), 본뜻의 약화에 이를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라띤 원문에 의해서 번역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다 옳을 수 없다는 이견(異見)도 있다. 이번 「지상의 평화」는 이태리어로 기초되었고 다른 외국어로 번역될 때 라띤어로 번역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변증(辨證)의 막연성을 가능한한 피하자는데 힘들였기 때문에 라띤어 사용에 있어서 적지 않은 문제의 여지가 있다는 말도 떠돌았다.
영어는 원래 희랍 라띤 불어 등 기타 외국어를 받아들여 완성한 것인데도 아직도 번역상에는 많은 불철저한 데를 가지고 있는 언어에 속한다고 한다. 이와 비겨서 우리의 사정은 생각해볼 때 참 요원한 것을 느끼게 해줄 뿐이다. 그러나 해방 후 번역부문은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거기 공헌한 서적, 잡지만도 결코 적지 않다. 어떤 번역을 문제삼을량이면 그것은 참 것잡을 수 없을만한 일인 줄 안다. 비록 어떤 번역이 그 분의 역작이라 하더라도 험잡으려 할 때는 얼마듣ㄴ지 다른 견해를 달 수 있는 법이다. 결정적인 오역은 이를 바로 잡아야 할 일이지만 마치 옥(玉)의 티를 찾는듯한 태도로 남의 귀한 글을 논박하는 일은 결코 관용의 미덕으로 볼 수 없고 또 그런 사람치고 길고 어려운 번역에 종사한 경험이 없는 수가 많은 것이다.
신문·방송 및 어느 저서의 몇줄 가운데서도 가톨릭에 관계된 번역은 10중 8·9는 엉뚱한 역어를 내놓고 있다. 가톨릭의 용어가 나오면 이것은 아주 특수한 것으로(특수한 것에 틀림 없겠지만) 따돌리듯 극히 주관적인 번역을 내놓고 있음을 본다. 이런데에 그 책임을 우리 스스로 느껴야 할 일인줄 안다. 그만큼 우리의 사회참여·문화계의 진출이 부족한 것이다.
적어도 가톨릭 용어(用語)의 권위를 가진 문화지(文化誌) 한 가지 정도가 있어서 번역의 표준이 되고 또 그 방면에 공헌에 주었으면 한다. 회칙 영역상의 시비(是非)는 큰 각성과 교훈을 주는 바 있으며 가톨릭 문화인들의 중책을 느끼게 해준다고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