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깐 공의회가 첫 의제로 전례문제(典禮問題)를 상정한 것은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전례는 교회의 공적(公的)인 기구생활 및 신자들의 신앙과 열심(熱心)의 표현인 만큼 가톨릭생활의 중심(中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번 공의회가 전례에 관한 토의와 결정을 하기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과거 50년간 이 전례변경에의 줄기찬 움직임이 있었음을 상기(想起)할 수 있다.
교황 비오 10세 당시 이미 전례변경의 논의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잘것 없는 것이었으니 1912년대의 주교, 신부 및 평신자들이 1962년에 공의회가 개최되고 전례문제를 우선(優先)해서 의결(議決)할 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례의 연구, 논의는 대단한 관심으로 발전해갔다. 비오 12세대에 이르러 전례운동(典禮運動)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더욱 그 박차를 가했다. 비오 12세는 전례운동을 『교회안에 천주성신이 작용하는 표적』이라고 했다.
미사때 교우들이 경문을 읽고 성가나 다른 공동신공을 함께 염경(念경)하며 성사와 예식에 나가는 그 형식 및 내용에 있어서 많은 이해(理解)와 열성을 높이게 된 것은 모두 이 전례운동의 결과인 것이다. 저녁미사만 하더라도 옛생각대로는 기이(奇異)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오늘 어디서나 저녁미사가 없는 곳은 없다. 또 사제(司祭)가 회중(會衆)을 향해서 미사를 봉행할 수 있는데 이것도 기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감명(感銘)을 줄 수 있음이 역연하다. 한국에서는 제대구조가 그렇게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택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공의회가 전례의 세부(細部)에 이르는 각 예전을 제정(制定)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기본원칙만을 분명히 세울 것으로 본다. 이 점은 의결사항(議決事項)에 있어서도 그러할 것으로 본다. 그러면 전례의 변경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먼저 공의회의 변경원칙 제정이 끝나, 시행령(施行令)이 나오면 각 지역 또는 그나라 주교회의가 가능한 변경을 실행하게 된다. 거기 도달하기까지는 요원하다. 곧 대단한 변경이 있으려니 하는 조급한 생각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1960년 6월 요안 23세께서는 전례변경의 기본원칙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례의 형식 및 기구문은 공의회에서 개혁되기를 바라며 그 결과 사제(司祭)에 의하여 교육적이요 교훈적인 효과를 나타내게 함으로 신자들이 천주를 흠숭(欽崇)하는 공식예배(禮拜)에 있어 자기들이 차지한 부분을 충분히 알게해야 한다. 사실 이 전례문제는 가장 중요하면서 그러나 오랜 세월을 두고 성숙(成熟)된 자명(自明)한 문제에 속하고 있으므로 공의회의 진행(進行)에 있어서는 가장 용이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56년 성주간 전례변경 당시에 이미 중요한 원칙이 나왔으며 그후에 현저한 발전을 수행해온 터이다. 신자들이 전례의 본 뜻을 잘 알아 듣도록 중복을 피하면서 간소화, 생략(성주간전례)한 것이라든지 성금요일의 영성체를 정하고 그날예절을 ①성경의 교훈 ②교회전계급을 위한 기구 ③십자가경배 ②3영성체의 4분분을 명시한 것은 전례본래의 뜻에 치중한 개혁인 것이다. 성지(聖枝)행렬은 죽음을 극복한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그리고 영세재신식(領洗再新式)은 영세의 약속을 재신(再新)함으로 부활예절의 진정한 뜻을 되새기게 한 것이었다.
요컨데 전례 자체를 더 잘 이해하고 그로조차 각자가 더욱 거룩하게 전례의 한 몫을 차지(占)하게 하자는데, 전례개혁의 주안(主眼)이 있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예전서(禮典書)를 개정하는 동시에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신자들에 그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 의무같은 것을 달게하는 수도 있을 줄 생각된다.
전례문제가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때를 당하여, 우리는 전례에 관한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톨릭의 전례를 처음 보는 이들은 흔히 장엄한 인상을 받았다고만 말한다. 숙연히 머리를 수기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던져주고 있음이 분명한데 만일 그 심오(深奧)한 뜻과 아름다운 표현을 똑똑히 설명해 주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가톨릭신자들은 어느모로나 전례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생활화(生活化)한 전례를 논의하고 있는 마당에 습성적으로 예(禮)에 임하는 타성에 만족지 말고 그뜻을 체득하는데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