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혼자만 천당 가겠다는 사람은 저도 구령못한다』 오래 들어온 말이다. 저만 잘되겠다는 지극한 개인주의와 상통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남이나 남의 일 남의 것에 부질없는 관심과 표현을 부리지 않고서는 못뵈기는 습성은 이기(利己)와 호대조라고 가볍게 해넘길 수 없지 않을까 한다. 이 또한 남의 말을 하는 것일지? 구라파 도시의 사람물결이 흐르는 포도를 거닐어도 시선(視線)을 마주치는 법이 없다. 서로 눈길이 부디칠 새라 조심하는 것이 역연하다. 하물며 여럿이 모인 장소에 있어서랴. ▲남을 유심히 바라보는 도를 지나쳐서 아래 위를 훑어 보는듯이 하고, 어디를 지나가는 사람의 그 차림새가 어떻더라까지 나올지경이면 그런 습성도 상당한 경지(境地)에 들었다고 여겨야 한다. ▲노인들은 말이 많고 또 말들려주기를 즐기는 모양이다. 젊은축이 말을 하기보다 듣기를 좋아하는 때문일까? 쓸데없이 그것도 주로 남의 말을 심히하게 될 때, 아 나도 노경(老境)에 접어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볼만 하다. ▲그리운 사람들 또 기억에서 땔 수 없는 사람들, 예사로라도 안부를 물었어야 할 그 사람들에 관한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것을 험잡을 수 없겠지만 남을 끌어넣지 않고서는 대화를 이을줄 모를만치 남(他)에서 남으로만 줄달아가는 그 남에 대한 관심을 경제(經濟)해볼 수 없을까 ▲교회생활을 하고 또 그 안의 「구룹」에 속했을 때 별로 타의(他意) 없이 남에 관한 것을 너무 들먹이다가 불의(不意)의 불화를 불지르는 일을 흔히 경험할 것이다. 이 하잘것 없는 겨자씨 같은 사실이 간혹 큰 결과를 빚어낸다. 적어도 쓸데없는 일에 남을 인용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면 남이 심한 화제에 오르는 모임에까지 나가기를 싫어할 것이다. 이만해도 성실한 「멤버」를 잃은 셈이 된다. ▲이번 공의회 논평기사를 보면, 합송미사는 최대한으로 장려할 일이겠지만, 그러나 그로인하여 개인의 묵상이 방해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 방해란 가령 묵념에 잠기고자 하는 사람을 보고 합송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것인줄 안다. ▲남의 말은 섬으로 한댓자 그댓가는 불화와 불목밖에 더 얻을 것은 없다. 남으로 인해 내가 죄범할 손실을 막기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