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임(林和吉) 신부님의 면찬(面讚)을 하자면 마치 친형님의 자랑을 하는 것같아 쑥스럽기마저 하다. 이렇듯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부님의 중후(重厚)하신 정의(情誼)에 목욕(沐浴)해 온다. 내가 첫 지각(知覺)이 들어서의 신부님 인상은 신품(神品) 공부하는 「후데이센진」(不정鮮人)이었다. 이 표현은 수도원(修道院)이나 신학교의 온화 위주(溫和爲主)의 기품(氣品)이나 기풍(氣風) 속에서 신학생들도 그 틀에 맞추어지는 것을 상책(上策)으로 삼는 판인데 임신부님은 그 언동거지(言動擧止)에 있어 언제나 사리(事理)에 비판적이고 논리적이고 진솔(眞率)하고도 강열한 개성을 발휘하고 계셨기 때문에 하급생들의 존경과 매력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신부님의 약여(躍如)한 면목은 은경축을 맞이한 오늘날까지의 당신 생애를 험난(險難)하게도 하였고 한편 찬란하게 수(수)놓고도 있다.
6·25 동란때 부산 피난지서 어찌 어찌하여 아메리카 외유를 떠나신 일이 있다.
좀 농반(弄半)으로 말한다면 당신답지 않은 행운을(?) 맞추셨다고 여겼더니 아니나 다를까! 2년이 체류기한이라는데 6개월이나 될까말까하여 돌아오셨다.
여장도 안푸신 신부님을 대구 주교좌로 찾으니 개구 일번(開口一番), 『구상, 글쎄 사람이 생명의 충격감(衝擊感) 없이 세상을 어떻게 살어! 그 「오트메숀」 속에서 미사나 지내고 밥이나 얻어 먹고 남의 생활을 멍청히 구경이나 하고, 도무지 살 맛 없어서 보따리를 쌌지. 불행, 처참, 험난, 이 우리 속이 좋아!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교통사고를 주의 할래기, 인생이고 사상이고 생각할 맘이 어디 있담. 미국! 그들에게 문명과 지식은 있을지 모르나 인생과 사상은 우리에게 더 풍부해!』
거침없이 그 성실한 표정과 음성으로 토파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한국인의 아메리카 기행에서 이 이상의 감동을 받지 못한다.
이러한 자기 형성의 사상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신부님이시기에 소위 자유당말기 대구 매일(大邱每日) 「테로」사건을 감당하시고 이를 승리로 이끌므로서 오늘의 대매(大每)의 발전과 교회의 위신을 내외에 높이셨다.
사실 대매사건이란 문제의 사설을 정정하든지 인사를 이동하면 그만인 것이었고 또 현재 한국의 언론계가 항다반사(恒茶飯事)로 하는 수법이다. 그러나 신부님은 여당 폭력단의 습격의 최후 통고를 받고도 이를 거절, 태연자약하게 그 자리를 고수(固守)하셨다. 아마 우리 언론사상에 이것은 임신부님 개인보다 천주교회의 영예로서 기억될 것이며 우리 가톨릭 언론은 이 전통을 훼손(毁損)치 말고 이어 나가야 할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이 제천명(天命)에 드셨고 은경축마저 지내셨다. 서방은 신학교에서 후배도 양성하시거니와 자기 신앙과 사상의 최후적인 완성에 나아가고 계신 줄 안다. 그러나 가톨릭적으로는 황무지인 우리나라 문화가두(文化街頭)에 그 언젠가는 다시 한 번 나오셔서 그 고매(高邁)한 정신과 불굴(不屈)의 투지로서 우리의 산만하고 유기(有機)성이 없는 가톨릭 문화역군들을 조직하고 분발케하고 지도해주셨으면 하는 것은 나만의 욕심이랄까! 아니 시방 이래도 대구 지성층에게 대구를 거쳐간 10지의 인물을 곱아 보라고 하여라 단연 몇째 안가 우리 林和吉 신부님을 들테니! 이렇듯 나는 신부님을 자랑하라면 내 스스로가 어린애처럼 우쭐해진다.
여아선(與我善)이면 선(善)이라드니 참으로 신부님은 청소년 시절부터 나를 언제나 달래고 위로하는 편만을 취하셨나보다. 오늘까지의 나의 사십평생 역시 결코 행운이나 성공자이기 보다는 방랑과 역행(逆行)과 불운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하겠다. 그러니까 친형인 가별신부(공산당에게 납치)가 나의 행장(行狀)의 불안정을 탄하고 나무라면 언제나 신부님은 나의 편이 되시어 성공보다 실패의 진미(珍味)를 깨닫게 하셨다. 이것은 실상 나에게만이 아니라 신부님을 사사(師事)하던 수많은 청소년 학생이나 신자, 미신자를 막론한 인간에게 임하는 신부님의 자세인 것이다. 당신 앞에서 우리는 어떤 인간적인 오뇌도 털어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천주의 존재도회의(懷疑)하고 무신론, 반신론(反神論)까지도 아무 꺼리낌 없이 주창하기도 한다. 그러면 신부님은 먼저 교리(敎理)를 가지고 임하는게 아니라 언제나 다정한 벗으로 자기 스스로의 이성적 신앙(理性的 信仰) 이전의 의문을 정직히 제시함으로써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초자연적 인식의 위압이나 외포(畏怖)로부터 벗어나 그 손길에 매달리게 된다.
임신부를 나더러 쓰라면 쑥스러우면서도 한이 없을 것이다. 오직 한마디로 하면 당신은 천성의 진솔(眞率)인으로서 과연 탁덕(卓德)이라 하겠다.
具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