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누가 뭘 쓰다가 나 한테 와서 「외람」이라고 한자를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다.
『외람?』
나는 얼핏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엇더니 『외담되다』 『외람스럽다』하는 외람이었다. 즉 격게 맞지않는 지나친 혹은 건방진 하는 뜻의 외람이었다. 나도 선뜻 한자가 생각이 안나서 망서리다가 「猥濫」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외람이란 말 쯤은 한글로 써도 좋을텐데 무엇을 쓰길래 그런 어려운 한자를 일부러 찾아쓰나 했더니 약혼중에 있는 여성에게 하는 편지였다.
『그런 편지 같으면 일부러 어려운 한자는 안쓰는게 좋을 걸』 나는 말했다.
그는 내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나한테서 얻어간 「猥濫」자와 함께 가급적 많은 한문자가 들은 편지를 쓰고 있었다. 흘끗 어깨 너머로 일별을 했더니 「生覺」이란 글자가 많이 눈에 띄였다.
『「생각」은 한글로 쓰지 왜 구차스럽게 획 많은 한자를 쓰나?』
하고 말했으나 그는 한자로 쓸 수 있는 말은 일부러 모조리 한자로 써 넣고 있었다.
내가 알기는 그의 약혼자는 25·6세의 대학영문과를 중퇴한 젊은 여성인데 영어는 알지 모르나 「猥濫」이라는 한자를 쉽게 알는지 의문이다. 이러한 나의 노파심은 그 여성의 학식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猥濫」이란 한자는 지금 쓰는 예가 극히 드물고 구태어 한자로 표현해야 할 아무런 까닭이 없는 말이며 따라서 편지를 받은 사람의 학식으로서도 그 글자를 모를 수도 있는 일이다.
문장이란 이쪽의 하고자 하는 말을 쉽게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목적인데 일부 일부러 남을 곤경에 몰아넣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生覺」이란 것도 「생각」이면 족하지 구지 한자로 쓸 필요가 없는 말이다.
편지뿐 아니라 저술(著述)에 있어서도 그와같이 어려운 한자를 많이 쓰는 사람이 있다.
어느날 기증받은 서적을 펴보다가 필요 이상의 한자가 많기에 읽다가 말고 내덮어버린 일이 있다.
理知, 理性, 認識 이와같은 말들은 다른 말과 혼동되지 않고 그 말의 표상(表象)을 뚜렷이 하기위해서 오히려 한자로 쓰는 것이 좋다. 읽기에도 편리하다.
그러나 猥濫, 生覺 따위의 한자는 우리 말에 대한 사족(蛇足)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한글 전용에는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 편이며 그 까닭은 전기한 이성(理性) 이치(理致)와 혼동되기 쉽고 눈에 쏙 들어오는 말 자체의 상형적(象形的)인 무개를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불필요한 한자가 즉 우리말로 써서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들이 많이 횡행(橫行)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근자 일본 신문을 보았더니 익사(溺死)란 말은 쓰지 않고 알기쉽게 수사(水死)라고 쓰고 있었다. 이에 비하면 우리네의 신문 잡지 그리고 저술에 있어서는 번거롭게 한자가 너무 많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시대적으로 보면 사십대 이상의 사람들이 이 한문조(漢文調)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는 그들이 과거에 받은 교육에서 현대감각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낡은 것에서 답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장(文章)의 길은 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그리고 쉽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남에게 전달하느냐에 있는 것이며 문필에 매양 종사하는 우리로서도 역시 자신을 못얻고 때로 한개의 적당한 표현을 못얻어 고심하는 적이 많다. 거기에 맞는 어려운 한자가 생각이 안나서가 아니라 남의 심금 속으로 쏙 들어 갈 수 있는 부드러운 표현이 아쉬워서다.
崔要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