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한국가톨릭교회사(敎會史)에 대서특필할 일은 한국의 모든 교구가 「로마」 교황청 대목(代牧)교구로부터 본교구로 승격한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자치교구의 지위를 누리기에 마땅하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같은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
본란은 본교구 승격에 수반하여 각 본당의 자치(自治)가 확립되어야 하겠음을 강조해왔다. 본당은 그 교세의 성장(成長)으로 장차는 소교구(小敎區)로서의 면목을 구비해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당발전을 뒷받침할 중요요건(要件) 가운데는 필경 경제력이 다르지 않을 수 없다. 곧잘 이 경제면 즉 재정에 관한 요건을 경시하고 잇음을 본다. 한 본당의 재정이니 달리 복잡성을 띠고 있을 것도 없고 그런데 과도한 힘을 기울인다는 것은 타산(打算)에 밝은듯한 인상을 주지 않을까 하는데서 비롯한 경향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참으로 건전한 본당발전 및 그 장래를 차근히 설계해가고자 한다면 건실한 재정의 기틀을 잡기에 힘을 아낄 수 없을 것이다.
경제원칙은 본당에서도 다를 것이 없는 법이다. 수입을 늘이고 지출을 억게하는 원칙에 서지않고서는 경제의 파행(跛行)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면 본당의 수입 및 지출의 평형을 어떻게 잡아갈 것인가?
가령 수입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한 지출을 집행해갔다고 하자 비록 그 지출이 좋은 목적에 값있는 사업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로조차 받을 부작용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것은 첫째 경제원칙에 벗어났기 때문이다. 학생들이나 젊은 구룹들이 흔히 범하는 일이다. 무슨 사업계획을 힘에 겹도록 크게 세우고 거기 소요되는 관분한 경비를 결국은 본당신부나 유지들에게 호소하는 수가 있다. 이같이 재정면을 무시한 사업행사들은 실효(實效)보다 겉치레에 그치거나 값싼 영웅심의 발산에 지나지 않음을 종종 목격하는 일이다. 이같은 사정은 본당 전체에 관해서도 미쳐서 생각해볼 만한 일인줄 안다. 그때문에 본당재정운영에 있어서도 재정위원이 있으면 신중파의 견해를 무게있게 들어줄 만하다. 본당재정은 큰 곳이면 1년간의 예산편성이 미리 작성되어야 하고 어디서나 줄여서라도 6개월 이상의 튼튼한 재정 계획이 서야만 한다. 본당예산편성에 있어 특별히 재정이 넉넉한 큰 본당에 있어서는 ①다음 회계년도에 이월시킬 수 있는 준비금 항목이 설정되어야 하고 ②재정이 빈약한 본당 및 신설본당이나 농어촌 벽지의 빈곤한 본당을 정기적으로 원조해줄 수 있는 예산항목이 설정되어야 한다. 이런 취지는 일반신자간에 주지되어 보다 큰 지지와 협조를 얻어가야 할 것이다. 대체로 1천명 이상의 본당이면 예산의 규모나 모든 격식이 건실하고 반듯해야 하며 다른 곳을 지원하고 의욕을 보여줌직한 일이 아닐까.
본당재정에 무관심하기 쉬운 일반신자들이 본분의 일부로 치루어야 하는 교무금 납기를 당하여, 이상 지적한 것들에 관심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교무금은 본당이라는 공동체(共同體)의 일원이 된 각자의 숭고한 의무인 것을 장황히 논할 필요는 없으리라.
매년 이때는 개인이나 가정 경제에 있어 배가 되는 지출을 보게 마련이다. 거기 교무금 납기가 겹쳐있어 중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교무금은 분명히 생활경제의 한몫을 차지하는 지출이다. 그때문에 우리의 절실하고 가치높은 의무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교무금을 만일 가볍게 호주머니에서 손끝으로 꺼낼 수 있다면 그것은 주일애긍이나 거리에서 흘리는 희사에 불과한 것이다. 교무금은 마치 한 세납(稅納)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비록 그 성질은 다르다 할지라도 의무감(義務感)에 있어서나 방법이 전혀 같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의무(義務)보다 숭고한 것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서든지 제게 맡겨진 의무를 수행해감으로써만 또한 자신을 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교무금의 의무는 다른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만치 그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다른 동일한 의무와 비교해서는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줄 안다.
이제 한국 가톨릭교회의 자치적 본교구 설립의 첫해를 보내는 교무금 납기에 즈음하여 비록 전해보다 더 많은 것을 납부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정성 및 제때에 바치는 적은 마음가짐에서부터 혁신의 의연(毅然)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겠다. 우리가 희생을 치르면서 지출하는 교무금으로써만 본명의 재정적 자치가 구현된다는 것을 염두에 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