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하오 7시20분(한국시간) 역사상 최대수인 80명의 추기경들이 참가한 교황선거 추기경회의는 불과 2일만에 요안23세의 후계자 바오로6세를 선출하였다. 30일(성 바오로 기념일)에 거행될 교황대관식을 앞둔 새 교황께서는 교황직위를 수락하는 의식들을 마치고 피선된지 약 1시간만에 성 베드루 대광장을 메운 군중 앞에 나타나 첫 교황 강복을 베풀었다.
바오로6세로 등극한 「미라노」대주교 죠반니.바띠스따.몬띠니 추기경은 1897년 9월26일 이태리 「꼰체시오」에서 탄생, 1920년 5월29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1922년부터 23년까지는 「와르샤와」 주재 교황대사관에 근무한적도 있으며 그 후 약 10년간 이태리 가톨릭·악숀에 종사해왔다. 이 기간 중 주목할만한 것은 항상 국제적인 일을 담당했었고 동 대학생 지도부의 책임자였었다. 1933년부터 「바티깐」 국무성에 근무해오던 중 1936년에는 동 차관보로 승진했다. 1952년에는 동 차관으로 승진했으며 1954년 12월12일 「미라노」 대주교로 서계(叙階)되었다. 1958년 12월15일 요안23세에 의해 추기경 임명을 받았다.
바오로6세는 주로 비오12세대에 성청에서 그의 경력을 쌓았다는거와 또 그간에는 2차대전 및 그 전후의 역사적 격동기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교리문답에서 교황은 교회 안의 볼 수 있는 으뜸이요 예수·그리스도는 그 볼 수 없는 으뜸이라고 배웠다. 가톨릭교회의 영성적(靈性的) 최고통치자로서의 교황에 대한 우리의 인식(認識)은 이 교황직을 그리스도 친히 설정했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교황직을 세우시고 베드루 종도(=반석)에게 『나 또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루라 나 이 반석 우에 내 성교회를 세울 것이매 지옥문이 쳐이기지 못하리라』(마테오 16·18)고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교황(敎皇)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론 거기 존경하는 뜻이 충분히 포함되어 있음은 사실이겠으나 가령 영어로 「포프」라 한 것은 라띤어 「빠빠」에서 나오게 된 말인데 「빠빠」는 아버지란 뜻이다. 우리말 「교황」은 존경의 뜻을 보태는 반면 친숙(親熟)의 뜻을 잃고 있음을 어찌할 수 없는 일이겠다.
교황의 직분 또는 그 권한 등을 장구한 역자적 과정에서 논한다면 한량이 없을 것이다. 반드시 그러한 지식보다 교황직은 분명히 예수 친히 설정한 것임을 밝혀 인식함이 가장 필요하고 중심된 인식이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반증할만한 논증은 허다히 있겠으나 우리는 목전에 새로 대(代)를 이은 바오로 6세의 등극을 보고 더욱 그것을 굳건히 해준다고 하겠다. 연면(連綿) 2천년 교황의 역대만큼 확실하고 또 파란곡절과 극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인간의 역사는 없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어느 역사적인 순간 및 그 싯점(時点)을 자신있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단한 창조적 사상을 표방하는 그것들도 긴 세월에서 보면 참 초로(草露)같기도 하고 수유(須臾)의 하잘것 없는 생명이기도 했다. 그 중 얼마가 진정 역사위에 군림하고 거기 찬연히 수놓은 것이었다고 하겠는가?
가톨릭 교회사의 정화(精華)는 아무래도 순교사에 들릴 수밖에 없다. 순교란 진리를 드러내고 그것을 밝히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장한 일을 달리 찾아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가톨릭 교회 안에 초성적 생명이 없었다면 저 어느 왕가의 영화같이 사라졌을 것이요 어느 한 시대를 누비던 사상같이 한 조각 구름같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날로 그 생명의 초성한 힘과 그 볼 수 있는 제반제도에 이르기까지 천주 성신으로 보존되며 지속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지난 수주간에 요안23세의 서거와 오늘 등극하시는 바오로 6세를 맞이하기에 이르기까지 비록 소식들을 통한데 불과한 것이지만 그 역사적인 진행이 실로 일사불란(一絲不亂)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또한 인간의 지각과 인간적인 처사에 맡겨서 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교황에 관계되는 일반신문 논평 등을 대할 때 우리 가톨릭 신자로서는 일말의 주의가 있어야 한다. 바오로 6세의 등극은 곧 신성(神聖) 신정(神定)의 교황직에의 믿음을 굳게 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