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성탄절을 기하여 한국천주교회에 또 새로운 그리스도의 사자 30명이 사제위(司祭位)에 오르게 될 예정이다.
해마다 있는 서품이지만 해가 가고 사회가 변천함에 따라 오늘 우리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사제는 특별한 분들이어야 하고 이 시대적 사회적 요구를 충복시켜 나가는 거룩한 앞날에 더 풍부한 강복을 빌고 축하하는 바이다.
사제의 일거일동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 성격을 띠고 있다. 만인(萬人)을 위해서 만인(萬人)이 되신 스승 그리스도의 행위를 모방하고 실천하는 이가 바로 사제이다. 과거에 한 역사적 존재로서의 생존한 그리스도와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볼 수 있는 단순한 외적배우(外的俳優)가 아니라 스승의 사상과 행위를 실생활 속에 옮김으로써 새로운 또 하나의 그리스도를 자기 인간성 속에 옮김으로써 새로운 또 하나의 그리스도를 자기인간성 속에 실현하는 것이 사제이다.
자연과 초자연 사이를 중개하는 사제는 간단없이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마치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 중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미움과 배척 속에서 운명함과 같이 세상은 사제에게서 인간 이상의 그 무엇을 기대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제는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하낟. 육신을 지니면서도 천신과 같은 결백을 세상은 그들에게 요구한다. 세상의 부귀영화와 자기자신까지도 완전히 봉헌한 제물이 되기를 세상은 희망한다.
이 중대하고 숭고한 완전봉헌을 결정적인 「FIAT」(되여지이다)으로써 승락하는 장엄한 서품일이 지나면 그들은 포교의 제일선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 싸움터가 되는 오늘의 사회현상을 정확히 인식해주기 바라며 현실사회에 알맞는 사제가 되어주기 바란다.
교회는 모든 민족 문화 언어 풍속의 특의성을 파괴치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특성을 살려 그리스도의 사상에 동화(同化)시킴으로써 그 민족 그 문화만이 할 수 있는 흠숭 감사 그리고 사랑의 예물을 천주께 드리게 된다.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미국선교사라도 한국민족성을 정확히 터득할 수 없다. 한국민족성 위에 쌓아올린 특이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한국인이라야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통해서 또 특별한 환경에 놓인 인간을 그 환경의 인간을 통해서 인도하시는 것이다.
우리 한국은 한(韓)민족의 국민성을 가지고 있고 고유한 문화와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인간으로 조직된 사회다. 이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살리고 그것을 그리스도화 하는데는 한국인만이 할 수 있고 이렇게 해서 완성한 교회는 다른 민족이 만들 수 없는 개성을 갖게된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국민(韓國民)의 성직자라야 한다.
20세기의 한 국가로서 근대문화의 상속으로 이어받은 사상적 또는 실천적 영향을 우리도 받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배척하거나 말거나 싫으나 하잖으나 은연중에 우리 전 존재에 배여있는 것이다. 아비를 떠난 고아의 신세가 갖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비관에 싸인 20세기 사회의 꼴을 한국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유달리 불운한 정치경제의 과도기에 놓여진 우리 한국사회의 고아의 꼴이겠느냐? 그래도 형제애니 인류애니 하는 미명하에 인간개조, 사회재건을 목표로 허덕이고 있으나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위한다는 말 속에는 그 모든 인간이 함께 받들고 모시고 사랑하는 공동아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아비를 잊어버리거나 모르는 중에 혹은 고의로 싫어서 떠난 고아신세로서 어찌 재건의 성과가 나올 수 있겠으랴!
오늘의 인간은 자기가 떠난 참된 아비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찾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날 때부터 고아로 자라난 외교인은 물론 싫어서 떠나 방황중에 불안과 절망의 낭떠러지 언덕 위에 앉아 슬피우는 비기독교화되고 세속화한 탕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이 현대가 요구하는 사제들의 긴급한 사명이다.
새 신부님들이 수고하실 한국의 실사회도 이 세계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청춘의 정력을 전부 소진하면서 특별한 규율 속에서 특별한 울타리에서 속세를 떠난 분위기 속에서 혼련을 받았다. 이것은 얼핏 보면 그들의 임무와 상반되는 감을 준다. 인류는 처음부터 질서와 체계의 전복을 감행했고 그후 이 작란(作亂)을 거듭함으로써 현실사회란 것이 인생의 이상적 생활에 큰 장해물이 되게끔 발전시켜온 것이다. 다시 알하면 육체는 영신을 거스리고 물질은 정신을 자연은 초자연을 시간은 무한을 피조물인 인간은 조물주를 거스려 대립하게 되고 흔히는 육체, 시간 인간이 득세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육신을 지니고 있으면서 천사와 같은 결백을 지켜야 하고 자연과 물질에서 살면서 이것을 초자연계의 빛으로 성화하며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을 신에게 인도하는 사제의 인격도야와 완성은 오랜시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상이 전존재에 배이도록 하는 실천생활로써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세속을 처이길 수 있는 영신의 힘을 마련하기 위해서 일선을 떠난 후방에서 남모르는 훈련을 받아야 하기에 장차 그 속에서 일할 속세를 떠난 울타리에서 교육을 받고 실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립관계에 놓여진 이 현실사회를 처이기고 성화하는 길은 스승 그리스도부터 그 직후 제자 그리고 시대를 흘러가면서 많은 성자들이 가려쳐 주신 모범이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역류(逆流)하는 생활방식이다. 즉 사제들의 승리의 비결은 속적인 것이 아니라 속세가 비난 욕설하는 방법에 있다. 희랍인들에게는 어리석고 유태아인에게는 악한 표양이 되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선전하는 세상의 어리석은 자가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오는 사제인 것이다. 우맹하고 성급하여 보잘 것 없는 어부 베드루를 수종도(首宗徒)로 삼으셨고 세속에 알려지지 않는 비웃음을 받는 인간을 제자로 삼으셨다.
새로 싸움터에 나가시려는 신부님들이 그리스도를 선전하는데 요구되는 모든 방법을 터득해야 되겠지만 근본적인 요소, 그리스도의 제자됨이 참된 모습은 현대사회에서는 바로 우리가 자주 듣는 참 바보가 아닌 「바보」가 되는 것이다. 사제가 완전한 사제가 되고 그리스도의 사상을 많이 남에게 전해줄려면 박학한 지식이나 웅변이나 건강이나 부귀나 명예가 아니다. 속세적 방법과 꾀를 써서 세상을 정복하려고 나선다면 이 이상 더 어리석고 더 정력소비가 사제에게 있을 수 없다.
처세술의 전문가를 아무리 하더라도 사제가 따라갈 수 없다. 암흑과 어두움의 자식들을 거사려 싸우는 포교(布敎) 일선에서 사제가 쓰는 무기는 사제로서의 독특한 것이라야 한다.
그리스도를 좀 더 회상시킬 수 있는 생활을 하려면 물론 현실사회에서는 반드시 역류하게 되고 역류하게 됨으로써 그 사회에서 대우를 못받는 욕을 얻어먹는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제로서의 갖는 향기요 교회가 세기를 통해가면서 미치는 특이한 색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