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버군.
즐거운 신학교 방학을 앞두고 한편은 분주한 일도 있겠지. 오늘 별러서 긴 편지를 보낸다. 끝까지 읽어다오.
내 나이 너희적엔 신학생들이란 세상에 괴벽스런 사람들이었다. 교회법이면 교수들 전화번호처럼 알았지만 윤리면은 제6·제9계만은 정통했다. 그때 전례운동에 관한 소리도 들렸지만 회칙 「메디아똘·데이」를 정독하지 못한 정도였다.
오늘 신학생들은 그래서야 될 말인가. 분명히 세상은 바뀌었는데 오늘은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열고 있는 진실로 1천년래에 최고조에 달한 시대가 아니겠는가. 이런 시대적 요구에 눈뜨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야고버군! 방학 때 가톨릭 대학생들의 「악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학생들의 활동을 어디서나 볼 수 있지. 그 중 열성 있는 사람들을 보면 신학생들 보다 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들의 교회지식도 상당히 깊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군의 동료신학생들도 그들 대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혹은 기이(奇異)한 생각을 해본 일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야고버군! 명심하라. 그들의 평신자 사도직 활동이 활발하면 활발할수록 크면 클수록 사제(司祭)의 사명은 더욱 중대한 것이다. 평신자들이 사도직을 크게 표방하지만 결국 그 중심(中心)은 사제이기 때문이다. 중심 없이 무슨 일이 된다고 하겠는가. 그러니까 그들 대학생들의 가톨릭 운동은 자네들이 신부가 된 후에 좋은 협조자 혹은 반려자가 될 뿐이다. 그들이 성직자의 권리를 찬탈하는 줄 생각지 말 것이다. 그런 생각은 스스로 반성직(反聖職) 감정을 자극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사나 잘 받고 또 모든 법규를 잘 지키는 수동적(受動的)인 신자만 되면 만족할 것인가. 그런 신자만을 대하려고 하는가. 아니다. 그들이 비록 신부의 지배적인 태도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있드라도 그럴수록 그들 안에 사제의 도움과 부족을 보충해줄 일이 너무나 많음을 알아야겠다. 그들의 효과적인 활동 및 그들의 영성적인 내면(內面)의 발전은 오로지 성직자의 관여 여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사제의 열성 사제의 성성(聖性) 또 사제의 민주주의적인 수완은 곧 그들의 앞날을 좌우할 것이다. 오만한 신부에 의해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없어야겠다. 허리멍덩한 ㅅ니부에 의해 그들의 현명을 흐리지 말아야겠다.
괴벽스런 신부에 의해 그들의 분개를 사지 말아야겠다. 게으른 신부에 의해 그들에 충격을 주는 일이 없어야겠다.
야고버군! 쓰다보니 대학생들편만 두둔한 것 같구나. 다같은 젊은이들을 두고서. 그러나 너는 그래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네 마음 속은 벌써 신학교를 떠나자는 생각이 너도 모르는 어느 한 구석에 움트고 있는 것이다.
오늘 교회의 가톨릭 「악숀」은 분명히 사회적인 행동과 밀접히 연결된 것이다. 우리는 레오 13세에까지 치껴올라가 근 60년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 주택 상류사회의 각성 협동조직 저개발국 인구문제 및 도시생활 등 교회의 사회회칙에서 언급된 문제들에 상당한 전문지식을 가져야 한다. 사실 이런 문제들을 외면할 때 교회는 무엇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비오 10세께서 요청하신 전례운동에 대해 무관심한 신학생이 무엇에 열심한다고 하겠는가. 전례문제 밖에도 교리문답의 개선 및 그 교수법에 대해 상당히 새 것을 추궁해 가야한다.
신학자 칼.라나 또는 한스.큉 같은 분이 제2차 바티깐공의회에 큰 영향을 던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체 무엇인지? 그들이 추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활발한 성서연구는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소위 반동(反動) 개혁 또는 쇄신(刷新) 개혁하는 시대는 가고 말았다. 그것은 그대로 완성되었고 우리는 이제 재신(再新)이란 이름을 걸고 교회일치의 새 시대를 영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50년의 앞날을 장만한 것인데 그것들의 추세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가톨릭의 본질(本質)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어떻게 옳은 가치와 완전한 전통 가운데 이 변화시켜야 하는 운동을 실현할 수 있겠는가. 그런 운동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좌(聖座)의 윤허를 받은 것들임을 밝힐 수 있다. 오늘처럼 그 행동 실천을 요구하고 있을 때는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야고버군! 아 이런 것들은 너무나 숭고하고 큰 명령이다. 감동과 어떤 타오르는 젊은 힘이 아니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뿐이다. 그러나 야고버군 너는 지금 그런 것들을 교리·윤리·성서·역사·수덕학(修德學) 전례 및 교회법을 포함한 신학에서 가장 근실한 출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시작하여 사회, 심리, 인간발전 및 사회구조(社會構造)에 눈을 돌려 가야하는데 이때에도 꼭 익혀둘 일은 그 모든 학문이 지성적인 요구를 채울 최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선의 문화 수준을 지녀야 하는 동시에 천주성과 또한 긴밀한 관계에 있어 일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야고버군! 그 때문에 너는 장차 가장 남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가 되면서 그러면서도 담담히 유창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가져야 한다. 퍽 모순된 생활같이 들리는 이 생활을 천주성부와 긴밀한 관계에서 해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할 말이 너무나 많다. 독신생활만 하더라도 결혼생활을 얕게 보거나 지나치게 존대하지도 않고 그저 자유 안에 독신생활의 본 목적을 달성해가는 그 또한 담담한 생활을 차지해야 한다. 야고버야 두서없이 되었다. 나의 넉넉지 못한 글줄을 살피지 말고 가끔 이렇게 내심정에 충만해오는 정성을 읽어다오. 나는 아직도 글 쓸 때 열띄는 어린대가 있구나. 우리 신부들이 어린 소년들과 더 잘 어울리듯이 말이다. 그러면 방학때 한 번 만나자. 그때는 거창한 말이랑 걷어치우고 즐겁게 이야기 꽃이나 피우자구나.
안드레아 신부(필자 안드류 W.그릴레이신부는 미국의 청년문제 전문가. 저서 「그 집의 손들」이 있다. (아베마리아誌에서))
안드류 M.그릴레이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