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대주교님은 키가 크시다. 한국 주교님들의 교황단체 알현의 기념사진을 보아도 그 중에서 제일 크신 이가 이 어른이시다.
이전에 가까이 뵈올 때마다 새삼스럽게 느끼던 그의 소박성은 주교가 되시고 대주교로 오르시고 공의회의 교부라는 역사적 인물이 되신 후에도 아무런 변함이 없으시다.
당신의 고향은 경남 밀양군 언양이다. 아직도 서울교구에 속하던 먼 옛날 부산 영도의 바닷가 「조내기」는 지금은 커다란 청학동본당이지마는 그때는 가난한 어촌이었다. 바로 그 「조내기」본당에 속하는 산촌 언양이야말로 돌아가신 두 분을 합하면 열 세분이나 신품 성소가 배출했고 그 중에서 주교가 두 분이 나셨다.
서 대주교님은 이러한 성소의 모자리에서 자라셨던만큼 신부가 되려는 생각은 아주 어려서부터 진작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에 오신지 얼마 안 가서 당신이 성소를 받으신 고향의 공소는 본당이 되었고 당신도 신품을 받으시기에 이르렀다.
사제서품 25년간-그동안 무슨 기억에 남기신 일은 없읍니까?고 졸라도 서대주교님의 표정에는 반응이 없으시다.
『아무 것도 없어』
『그럼 본당은 몇이나 지나셨나요?』
『다섯군대』
『그 중에서 제일 애쓰신 데가 어디었지요?』
『첫 본당 화원이었지오. 신설이라! 대성당도 그랬으나 그건 손이 부족해서』
『제일 재미 있으시던 곳은요?』
『상주라. 해방 후이었으니까 전교가 잘되고. 남자 어른들이 열심이 귀를 기울이던 것이 일제 탄압 때와는 달랐지요』
이제야 비로소 당신도 말씀을 꺼내신다.
『나는 처음부터 「인테리」들을 지도하고 또 그들에게 전교하는데 관심이 있었지오. 지금도 그렇지오. 신앙은 물론 위에서 내리시는 성총이지마는 진리를 지성으로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니까.』
이 때 마침 대구시내에 최근에 개점한 가톨릭 서점에 관한 보고가 들어왔다. 이것이야말로 당신의 관심이 크시다는 「인태리」 전교를 위한 사업인 것이다. 무슨 신통한 말씀이나 있을까 해서.
『25년 동안 특별한 일이 아주 없으신가요?』라고 마지막으로 여쭈어 본다.
『아 병난 것 밖에, 오지리서는 그곳 교황대사가 매월 꼭 한 번씩 문병오시고. 「카디날」이 바쁘신대로 종종 들여다보시고, 보좌주교는 가끔 와주시고.』
루디신부의 효성으로 「비엔나」까지 가셔서 건강이 현재의 정도로 회복해 오신 일을 추억하실 때만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신다.
『또 없읍니까?』
『공의회. 교황님을 뵈옵던 일. 처음으로 뵙기는 1960년이었는데 어쩐지 그날은 교황님은 약간 정신이 없으신 것 같다고 같이 갔던 신부가 말하더군. 워낙 일이 많으시니까….』
당신의 회상은 선교황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인품에 이르러 벅찬 것 같다.
『작년 우리 한국 주교들이 단체로 가서 알현했을 때 원주교님의 수염을 보시더니 「바르바르」 아아론이라고 모이시의 형님 아아론의 수염을 이야기하시면서 재미있어하시던 일도 있었읍니다. … 또 「로마」의 고대 유적이 원상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옛날 그 규모의 굉장한 것은 상상도 못했읍니다』
그 나라의 고유한 전통문화의 보존을 경탄하시는 심정은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도 그처럼 보존되어야 한다는 당신 관심이 무의식으로 표현된 것 같다.
풍랑 없는 항해와도 같던 당신의 지난 25년은 앞으로도 아마 그대로 계속될 것이다.
金益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