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란 말을 가장 많이 자주 쓴 한 해를 마감하고 있다. 나무 한 포기 심는데도 수도 · 전기요금을 지불하는데도 그것이 모두 혁명과업 수행을 위한다는 말을 넘치게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구호삼아 부르는 혁명의 참뜻을 새겨보건데 혁명은 외견(外見)만으로도 그 모습을 바꾸어 놓을만한 일대 변이(變異)를 실현할 수 있어야 그것을 두고 비로소 혁명했노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상의 중요한 혁명은 아마 프랑스 대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및 미국의 민주혁명 그리고 러시아의 볼세비키혁명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제일 앞장세우는 프랑스 대혁명만 해도 여지껏 그 진상(眞相)을 석연히 밝힌 것이 없다. 그 큰 까닭은 아직도 그 혁명의 여파(餘波)가 뜻하지 않은데로 파급(波及)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구나 그 혁명이 과연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주었느냐는데 이르러서는 자신있는 대답을 못하고 있는 판국이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의 불가능을 고집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진실히 생각해보고자 할 뿐이다. ▲저 성 프란치스꼬는 그가 발심(發心)했을 때 옷 한벌 걸친 빈손으로 부자집 맏이의 온갖 것을 다 뿌리치고 말았다. 그냥 훨훨 벌판을 향해 길 떠나고 말았다. 고담같이 실감이 없겠지만 혁명된 인간의 모습을 그만큼 선명히 말해준 것은 드물다. 혁명의 결과는 가공(可恐)할만한 것이지 결코 평온하고 고요한 것은 아닌상 싶다. ▲흔히 가톨릭신자가 되기를 퍽 두렵게 여기는 사람을 보는 수가 있다. 개종심리(改宗心理)의 미묘한 분석을 빌려서 설명할 일이겠지만, 그 하나는 개종으로 자기 내면(內面)에 생길 혁명에 미리서 질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반사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혁명을 잘 말해준다. 인간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품을 때(所有 또는 同化라 해도 무방하다) 혁명의 불꽃은 여지없이 피어오르게 마련이다. ▲이미 혁명된 자기의 재발견(再發見), 이 또한 그리스도적 혁명을 불질러 주고야 말 것이다. 그것은 고요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조잡하고 거칠게 쓰여지는 혁명의 구호와는 값을 달리한다.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이루어질 한없이 고요한 혁명! 오직 지극한 참 겸손으로 구유 앞에 무릎을 꿇고 혁명이 약속을 주고 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