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프로테스탄」 친구가 『자네들은 성당 안에서 꾸벅 절을 하고 있는데, 뭘 보고 절을 한다는 건가? 자네같이 지성(知性)을 표방하면서 그렇게 원시(原始)의 때를 못 벗고 있는가?』하기야 성당(즉 천주의 집)을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무리도 없는 말이다. 그 친구의 사고방식에 만일 성당의 「제대감실」 안에는 생활하는 천주 성자의 참몸이 계신다고 하면 『자네 말을 에누리 없이 듣기로 하세! 만일 그렇다면 나는 아주 성당 안에서 살겠네. 그곳이 바로 천당일텐데…』 이렇게 익살을 부릴 것은 뻔하다.
▲많은 설명이 반드시 남을 설복시킬 수 없다는 것은 노상 경험하는 터이다. 위의 사연은 어느 독자가 들려준 것이었다. 그 분의 글을 읽어보면 그 「프로테스탄」 친구가 감실 안에 모신 성체의 현존(現存)을 완강히 부정하는 그만큼 그 분은 강력히 신앙하고 있었다. ▲『「뉴욕」시에서 개업하고 계시는 변호사 여러분! 본인 역시 한 법률가로서 늘 자연법(自然法=神法)과 관습법(慣習法)의 관계를 추궁해 왔읍니다. 법의 본질에 들어설쑤록 많은 설명이 더욱 혼선을 이루어놓는 것 같드군요. 나는 성당의 예수 아기를 품에 안으신 성모상을 생각해 봅니다. 천주시요 구세주이신 예수 아기는 자연법이며 그를 안으신 성모님은 바로 관습법입니다』(오경웅 박사 연설 포담大學法學_에서) 성당 안의 제대감실은 고사하고 한 개 성모상을 보고서도 이만한 묵상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인가 한다.
누구라도 불신(不信)하는 고집만 버린다면 그 순간부터 높은 지성에 접근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의 우리네 신앙생활은 지성(知性)이라는 한 개 기능(機能)만이 아니라 전인격 전기능(全機能)을 통해서 천주와 상통하며 그야말로 신인교류가(神人交流)가 되어야 신앙생활 즉 생명활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지성(知性)이란 한 기능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전체가 아니며 반드시 우선(優先)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안(知)다는 것을 표방할 때 송구스런 일이 모두이다. 또 『그럼 나는 성당 안에서만 살겠다』는 그런 생각도 신앙생활이라는 종합적인 생명활동을 불이해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과 현실생활은 시시각각으로 대결해야만 한다는 것은 솔직히 긍정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