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저거 보게, 뒤꿈치가 송곳같은 구두를 신고도 쓸어지지를 않지! 원, 참 신기해』
『글쎄말이야, 간들간들 쓸어질듯도 한데?』
명동 거리를 거닐게 되었다. 허구많은 얼굴들이 밀려오고 밀려간다. 시골서 온 할아버지들의 눈에는 숙녀들의 「하이힐」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우두커니 서서 온통 화제가 「송곳 신」으로 옮아갔다. 하기야 그들에게는 그것이 정말 신기하게 보일 것이다.
어떤 이는 통배같은 큰 구두를 신고도 층층대를 오르내리다가 발을 삐어 두 주일이나 병원에 입원했다던데 저기 숱하게 지나가는 「하이힐」의 무리중에는 아무도 발을 삐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어찌된 일이냐?
「하이힐」이 발을 삐지 않고 넓적 구두가 발을 삐어 고생을 했다니 말이다.
그 까닭을 생각해 본다.
넓적 구두는 그만큼 주의가 부족했던 탓이고 「하이힐」은 그만큼 주의를 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발에 「하이힐」을 단 그들은 온통 신경이 거기에로 쏠려있겠지-? 그러나 대뜸 반문할지 모르겠다.
『세상에 신발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고야 어떻게 살려구, 그건 「하이힐」을 모르는 소리야』
물론이다. 처음엔 신경을 무척 썼겠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신경을 쓰지 않아도 태연하리라. 그들은 그만큼 「하이힐」의 덕행을 닦은 셈이다.
「하이힐」의 덕행! 그럼 덕행이란 무엇인가?
덕이란 덕행이란 무엇인가?
덕이란 좋은 일을 오랫동안 되풀이해서 얻어진 좋은 습관이다. 어쩌다 망나니가 지나가는 거지에게 돈 한푼을 주었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애덕이라 할 수 없다.
사랑하는 것이 그냥 습관이 되어 사랑치 않고는 못배기는 습관을 우리는 애덕이라 한다.
저기 「하이힐」의 덕을 닦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이 세속의 한 숙녀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닦아야 하는 덕행이리라.
『남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애덕을 닦으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리고 『너희 의덕이 「바리새이」의 의덕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겸손한 자 성총을 받나니 모름지기 너희는 겸손할지니라』
이렇게 애덕을 닦고 의덕과 겸덕을 닦으라 하셨다. 그리고 침묵의 덕을 닦고 순명이 덕을 닦으라는 강론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겸덕 의덕 애덕 순명의 덕이 저기 「하이힐」의 덕행보다도 값이 없단 말인가?
그들은 잠간후에 썩어져 없어질 세속의 이름 「숙녀」가 되어보겠다고 「하이힐 」의 덕을 거뜬히 닦아서 실수 없이 뻐젓이 명동의 거리를 물결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명으로 하는 우리는 아직도 겸덕 하나 닦지 못해 우리안에는 교만이 우쭐거리고 의덕을 닦지 못해 남의 눈을 속이려 하고 순명의 덕을 닦지 못해 윗사람 말씀에 입을 씰룩씰룩한다.
「하이힐」의 덕행을 보니 내가 쌓은 덕행이 부끄럽기 그지 얺구나!
「하이힐」의 숙녀들이여…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애덕을 「하이힐」만큼이나 다루어 보았는가?
가끔 「하이힐」의 눈초리에서는 증오와 시기 질투의 빛을 나는 가끔 보았노라! 세속의 자식이 더 지혜롭다더니 옳은 말이다.
「하이힐의 덕행」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는 세속의 설교자를 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위한 열망이 그렇게도 강했던지 스스로 노력했고 스스로 배워 익혔다. 그리스도의 겸덕 애덕을 닦는데는 그렇게 열망이 없었기에 수많은 강론을 들었고 책을 읽었지만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
「하이힐」의 덕행이냐? 그리스도의 애덕이냐?
우리는 아직도 「하이힐」의 덕행만큼도 그리스도의 덕을 닦지못했다. 수없이 「하이힐」의 물결이 지나가지만 하나 쓸어지는 꼴을 보지 못한다.
아쉽다! 아쉬워, 그리스도의 겸덕 애덕 의덕이 아쉽다.
저들은 잠시 이곳 세상 거리를 지나기 위해서 재빨리 「하이힐」의 덕을 닦았건만 우리는 영원한 천국의 거리르 ㄹ거닐기 위해 그리스도의 덕을 닦는데는 이렇게도 마음이 없단 말인가?
『주여! 우리에게 「하이힐」을 따라갈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朴道植(해군본부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