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번 가톨릭학생 전국대의원 대회가 염천을 무릅쓰고 강행된데 축하를 보낸다. 4일간(7월27일-30일까지)의 꽉 짜여진 일정 및 시간 등이 벌써 이 대회가 얼마나 긴장된 분위기 중에서 진행되었고 또 그 규모에 있어서도 대한가톨릭학생전국연합회가 명실공히 전국적인 행사로 대회를 시종해 갔음을 말해준다.
대회 첫날에는 주한 교황 사절 안또니오.델.쥬디체 대주교께서 가톨릭적 평화이념(平和理念)을 구체적으로 들어서 설명하고 요안23세의 평화회칙(回勅) 「지상의 평화」를 인용하면서 하나의 내빈축사이라기 보다 동 대회의 주 「테마」에 관한 연설을 했다. 이에 앞서 노(盧基南) 대주교께서도 대회취지에 언급한 간곡한 격려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동 대회가 전국대회를 표방하고 있다는 명목 때문만이 아니라, 오늘 가톨릭 학생운동이 당면한 중대성과 또 가톨릭학생 각자에 기대하는 교회의 관심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이런 중대성, 기대 및 관심 등을 최대, 최고로 강조해서 심할리 없다.
동 대회는 주 「테마」를 요안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로 정했었다. 이는 비단 동 회칙(社會回勅) 전반을 드러내자는데 그 본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 가톨릭 학생들에 자기성화(自己聖化)와 나아가서 확고한 목표를 주기 위해서는 이 사회회칙들만큼 힘있고 효과적인 것은 없는 줄 안다.
대회 「테마」에서부터 정신적으로나 제반상황이 불안하고 혼돈하며 또 혼미한 가톨릭학생들의 주변(周邊)에 향하여 가톨릭적 질서(秩序)와 그 질서에로의 복귀(復歸)를 부르짖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가톨릭 학생운동에 보내는 만강의 신뢰를 두텁게 해주는 것이 있다. 질서가 전도(轉倒)되고 붕괴되어가는 것을 좌시(坐視)할 수 없는 가톨릭 학생들의 올바른 태도를 천명하기에도 시의(時宜)에 유효적절한 「테마」를 선택한 것인줄 믿고 있다.
학생들이 제한된 서간에 동 내용을 만족할만큼 터득해갔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거기 사용된 술어(術語)들만 하더라도 일정한 정의(定義)와 공부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회 있는대로 요즘 유행되고 있는 「심포지움」 「세미나르」 등을 해갔으면 한다. 또 한 가지 적극적인 방법으로 사회회칙에 깊은 관심과 열성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회칙 연구 「구룹」같은 것이 있어 수시(隨時)로 연구발표회를 가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제3차 중·고교생들의 전국대회도 대학생들의 그것과 동일한 비중으로 중대한 관심을 집중시켰었다. 이번 8교구로부터 참석한 40명의 대의원들은 「고해성사」에 관한 연구토론을 주장삼았었다. 그들은 적어도 2주간에 한 번은 고해를 하고 이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겠다고 결의했다. 말하자면 중·고교생들의 신심생활(信心生活) 중에서도 거의 그 중심이 되는 것을 취급했던 것이다.
사실 10대의 신심생활은 소위 이유 없는 반항(反抗)이 아니면 형식치래의 위험을 격기 쉬웁다. 그 때문에 10대의 정서교육, 그보다 옳은 방향의 신심생활지도는 이 또한 교회가 당면한 큰 과업의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까다롭고 수다스런 방법을 쓸 것 없이 교리문답이나 부지런히 익히게 하고 꼬박꼬박 고해, 영성체나 잘 시키면 되지 않느냐고. 옳은 말씀이다. 그 위에 더 바랄 것은 없겠다. 헌데 그렇게 인도해가자면 학생들 자신 및 그 둘레가 오늘같이 복잡한 양상(樣相)을 보여주고 있을 때는 그에 맞서는 보다 진보된 방법을 선택함이 슬기로울 뿐이다. 우리고 닥달하면 된다는 생각은 늘 통하지 않는다.
만일 중·고교 시절에 공고한 신심을 장만했다면, 사회생활, 대학생활에 들어서서도 별로 우려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성인(成人)이 되기 전에 신심을 여행(勵行)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그들을 완전한 가톨릭적 분위기 가운데서 성장하게 해 줄 수 있는가? 이 어찌 교회적 관심사라고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연차적으로 실행되는 가톨릭학생들의 전국대회에 가톨릭학생운동의 전의의(全意義)를 붙이자는 것은 아니지만, 동 대회가 연중(年中) 가톨릭학생운동의 정점(頂点)을 이루었음을 높이 평가하기에 인색지 않는다.
바라건대 내년도 10주년에는 더 많은 준비와 보다 나은 진행 방법으로 가톨릭·액숀의 모범이 되고 전위(前衛)에 서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