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거족적으로 말썽이 된 「창가학회」의 배경이 「묘법연화경」이라기 보다는 「미노부」(身延)파(派)이든 「대석사」(大石寺)파이든 단적으로 말해서 일제(日製)종교 「일련종」인 것이 틀림없다. ▲「창가학회」가 아직 나오기도 전 일제의 전쟁 시절에 전쟁열이 유달리 열광적이던 「나이찌징」(內地人)들이 도대체 어느 불교종파의 무리였던가? 아침 저녁으로 「법고」를 미친듯이 둥둥 치면서 쉰목청으로 「나무묘호렝게꾜」를 집에서만 아니라 거리에서까지 「하찌마끼」 꼬라지로 떼를 지어 부르고 다니던 광경이 상기된다. ▲상해서 일련종 승려들이 중국군대의 진지에 접근해가서 도발적 행동을 감행한 것이 일본 육전대에게 발포의 구실을 마련했다는 신문을 본 일도 생각난다. 만보산사건 전후에 북경서 중국말로 인쇄된 「대동아신질서」의 선전물이 발견되었는데 그것도 일련종에서 한 짓이었다. ▲합방 직후 서울서 「나이생 잇따이」(內鮮一體)의 극성스러운 선전이 「귀족」집 안방까지 침투한 것도 「나무묘법연화경」을 통해서였다. ▲일련종의 어느 충군애국자 영감은 「명치천황」이 야전연습 구경중 들에서 내놓은 배설물을 황송히 떠나가 자기 집의 불단(佛壇)위에 모셨다는 「미담」도 일련종의 자랑거리였다. ▲능장(能將)이니만치 그의 학살성적이 보다 우수했던 임진란 때 왜장 청정(淸正)이 진두에 앞세운 것은 「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커다란 일곱자 길이로 염색된 군기였다. 졸개들도 무고한 우리 조상들의 목을 하나라도 더 베려는 무운장구를 위해 열광적으로 창제(唱題)를 하면서 신나게 복을 쳤을 것이다. ▲그때 할 수 없이 욕을 당한 그 조상의 자손들이 오늘날 하필이면 침략자의 사교(邪敎)를 잡라적으로 맞아오다니! 병 낫고 돈 벌고 취직된다는 바람에 순전히 한몸의 이익에 혹한들 어찌 그럴수가 있으랴! 그야 그때도 적진에 가담하여 우리편을 겨누고 방앗쇠를 당기던 망국노가 더러 있어 충무공을 슬프게 한 일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번만의 「창가학회」 신도들은 대부분이 무지의 탓이였으리라. ▲한국의 법화행자(行者)들은 일련의 일본 충성 이상의 한국 충성으로 「창가학회」들의 역(逆) 절복(折伏)에 앞장서야만 초록동색을 면할 것이다. 우리는 종교의 종류와 유무를 초워하여 정신적 왜구(倭구)를 무찌르는데 일치단결할 때가 왔다. (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