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전례(典禮)를 거행하는 가운데 사제가 교무금 납부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사제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유쾌한 일은 못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때 사목상 불가피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신자 가운데 돈만 아는 신부라고 불평을 토하는 자도 나온다. 그래서 본란을 빌려 여기 대하여 몇마디 피력해보고저 한다. 먼저 사회정의의 행동인 교무금 납부와 그 행동의 결과인 금전을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바이다. 말썽의 금전은 교회 생활과의관계에 있어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러나 본당의 정상적인 생활과 사제의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라 하겠다. 이 자명의 진리가 빈곤하다는 핑계와 「에고이즘」으로 눈이먼 어떤 신자들로부터 망각되는 위험이 있고 정말 말썽을 부리는 자들이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러므로 시낮로서 본당 유지와 사제의 신분에 알맞게 그의 생활을 보조할 책임이 있다는 의덕의 중대한 의무에 관하여 가끔 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을 유익한 것이요 또 때로는 필요한 일중에 하나일 것이다. 신자들은 예컨대 의사나 선생들에게 풍성한 사례금을 지불하기에 조금도 인색하지 아니하면서도 제단에서 먹고 살 권리가 있는 그들의 영신 관계 봉사에 헌신하는 천주의 사람인 사제가 신분에 알맞게 살면서 본당 생활의 더 좋은 발전을 보장할 수 있는 금전에 엄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떤 때 이해하기에 곤란을 느끼는 모양이다.
사실 본당신부는 자기 본당의 이익을 위하여 제법 막대한 금액을 관리하게 되어있다. 교회 경상비 여러가지 사업비 그리고 유치원이나 학교가 있을 때, 그에 대한 경비 제전비(祭典費) 부동산의 부설 및 유지 고용인의 급료 보험가입 그리고 성직자 개인의 의식주 등 당면문제가 있고 신학생 양성문제 병중에 있거나 혹 늙은 신부의 치료문제 종교교육을 위한 제반문제 「가톨릭 액숀」 교구살림 등 한 교구의 행정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구라파에 어떤 나라처럼 가톨릭이 국가의 부조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아직 꿈에라도 상상해 볼 수 없는 처지에 각 교구 각 본당생활이 신자 앞에 드러나는 복음적 가난의 증거는 그것이 아무리 비밀적이라 할지라도 매우 현실적이며 사제의 생활비도 그 신분에 비할 때 최저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 불란서 가톨릭에서 작성한 「앙케트」를 보면 시골 본당신부가 본주교로부터 받는 한달의 생활비는 그나라 우편배달부가 평균해서 받는 월급과 비슷하다고 한다. 한국신부로서는 부러워할 일이다. 소속 주교로부터 받는 것이란 도모지 없기 때문이다. 본당 교우들은 이러한 현실을 잘 파악하고 어려운 살림 가운데에서도 신자의 관심이 교구와 본당의 살림을 좀 보태주는 마음씨를 가져야 할 줄 안다. 현 공의회의 공적(功績) 중 하나는 교회의 통일을 개량하는데 있어 그 목자가 통솔하고 있는 교회의 중요성과 그 생활을 훨씬 더 많이 공개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을 위한 매우 실천적인 한가지 방법은 본 주교가 명한 교무금 납부에 있어 좀 관대한 태도로서 자기가 교구의 교회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본주교와 본당신부의 걱정을 들어주는데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넣어둘 일이다.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하는 현시기의 우리나라 형편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본당단위로 보나 교구단위로 보나 참으로 가난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신자들의 애덕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교회 형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사회적 정의와 형제적 우애로 연결된 행동으로 교회 살림의 긴급한 사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교무금 징수방법은 나라따라 다를 것이나 미국에서는 교회가 부과할 수 있는 소득의 추정(推定) 부담인 종교세(稅)를 신자들에게 푼다. 보통 연소득의 일할을 각 가정단위로 바치는 것이 의롭다고 보고 있다.
본당신부는 장소와 각자의 환경과 생활조건대로 교무금 징수의 방법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이를 위해 한편 예컨대 작년초부터 불란서 「빠리」 대주교구에서 실시한 혼배미사 장례미사의 등급의 폐지를 상기할 수 있다. 즉 그것은 달리 말하여 너무나 돈을 알고 돈에 대하여 너무 이야기하는 신부가 있다는 것이다. 이점은 시정되어야 할 줄 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신자들은 강론이나 교회 간행물을 통해 교무금의 사회적 종교적 가치에 대하여 더 올바른 인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교무금은 신앙과 주의 사랑과 관계없는 단순히 타산적으로 모으는 돈만이 아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교회의 경비를 부담하고 애덕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와 전교와 본당의 여러가지 사업을 돕는다.
그러나 교우금 납부의 인간적이요 종교적인 현실은 그를 납부하는 우리에게 달렸다.
여기 대하여 본당신부로부터 말이 있기 전에 우리는 주대전에 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하는 태도가 아쉽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조공을 주는 정도에 따라 우리를 천주께 주고 있다. 그때 우리는 교무금 납부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돈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