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이건 대학이건 졸업식에서 고사(告辭)를 부탁받은 이가 하는 말은 틀에박힌 거의 해마다 되풀이 하는 비슷한 내용이다. 3년이나 4년동안 애써 쌓은 형설의 공인 졸업의 영광을 청하하고 앞날의 성공을 위한 고무적(鼓舞的) 격려의 참고(參考)를 위한 경험담을 하게된다. 졸업식의 고사는 내용적으로 과거와 미래란 시간적 요소 안에 인생이 치루어야 할 어떤 노고를 상상시켜 준다.
물론 다른 인간기능이 아니라 가장 고상하고 모든 기능 위에 서있는 이성적 지력을 도구삼아 지불되는 노고를 말해준다. 인간이 인간다운 생을 보낸다는 것은 바로 자기만이 지닌 고유한 기능을 옮겨 행사하는데 있고 그 고유한 기능이란 이지력(理智力)을 말하는 것이다.
졸업할 때까지 학교라는 분수있고 제도화된 인간교육도장에서 각자가 한결같이 체험한 것은 「공부하기 싫은 것」이고 또 공유힝리면 가장 기븐 날이었다는 감회일 것이다.
인격완성의 과정에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위대하고도 가장 힘들며 또 많은 정력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지적 생활이다. 그것은 인간의 최고기능인 지력을 도구로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졸업 하는 날을 그렇게 손꼽아 기려지게 되고 또 그날이 즐겁다는 것은 이제 싫어하던 일을 다 마쳤다는데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다운 생활이 고유한 특성지능(特性知能)과 의지를 행사하는데 있다면 제일 힘들고 싫어지는 지능생활을 그만 둘 수 없고 끝매듭을 할 수가 없다. 다시말하면 우리 인간이란 동물(動物)은 다른 유(有)와 달라 인간이란 특수한 유의 보람있는 생을 보내기 위해서는 죽을때까지 지능적 의지적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졸업이 있을 수 없고 또 많은 젊은이들이 졸업이 끝나기 바쁘게 급속도로 소유 지능을 하지 않는 동물에 가까운 본능적 소행을 연출하는 이유를 짐작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좀 깊게 고찰해보면 지능을 얻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힘들고 싫은 지거생활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고 이왕이면 쉽고 편한 생을 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인간이라야 하고 그 특성인 이지력에 의해 움직여야 되며 그렇게 움직이려면 고생만 하다 마치는 것이 인생이란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수고를 요구하는 우리의 피치 못할 지적생활 목적을 초월하는 또 그것 때문에 가시밭과 같은 울음의 골짝을, 인생이 이해할 수 있는 고차적 목적이 있어야 한다.
졸업생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이 인생의 근본 수수께끼를 해결할 가톨릭 젊은이들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이렇게도 어지러워진 한국의 사회상의 흑면을 더욱더 캄캄하게 하는 것은 대중에게 앞날의 희망을 줄 수 있는 젊은 이들이 너무나도 가톨릭적 인생관에서 모순되는 행위가 너무나 현저하다는 현상이다. 특히 졸업생들의 비행이 사회적 흑면을 그려낼 만큼 보편적 현실이라면 아무리 가톨릭 학생들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서클」의 영향을 안받을 수 없다. 게다가 어떻게 된 것인지 좋지 못한 평을 받는 학생은 가톨릭이란 섭섭한 평을 가끔 듣는다. 또 졸업식 직후에 벌어지는 여러가지 비행도 자연히 가톨릭학생들이 끼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썩어가는 학생세계 어두워지는 학원을 소금같이 절이고 밝은 빛을 비추는 현대학생 평신도사도직을 담당하는 가톨릭학생들이 정반대의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말하면 동적(動的)으로 좋은 적극적 가치를 비가톨릭학생에게 준다는 것보다 소극적 영향을 자기네들 사회에서 순(純)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으로 진학하든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들어가든지 졸업했다는 것은 이제 자기본분의 한 토막을 마치고 그것이 연장되어 다른 부분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이건 대학이건 과거보다 더 많은 고통과 노력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게 부과된 고통을 내가 치루고 내가 썩어야 내 다음의 새싹이 튼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