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치명 복자 79위 축일(9월26일 목요일)이 들어있는 9월 한달은 비록 「첨례표」 상의 지정(指定)은 없으나 우리는 순교성월(殉敎聖月)이라고 불러왔다. 연중 어느 달 어느 날 우리의 기념할만한 한국 순교사(殉敎史)와 인연이 없는 날이 있을까마는 이 9월은 가장 많은 순혈의 장한 날로 이어져 갔었다는 것은 분명히 역사가 밝혀주는 바이다. 9월의 매일을 「순교의 성월」로 정성스리 맞이한다는 것은 이땅에 생을 받은 가톨릭자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심향(心向)인 것이다.
저 역사상의 치열했었던 어떤 정신운동 또는 사상의 억센 물결을 읽고 들어볼 때, 그 중에는 인류의 찬연한 기념탑이 된 참 가찬할만한 것들이 결코 적지 않다. 인간을 계몽하고 또 훌륭한 문화창조의 바탕이 되어주기도 했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소중한 인류문화의 유산으로 보고 교육이란 고가(高價)를 치르면서 부닫혀 전달해가고 있다.
단지 이러한 피상적 가치만을 듣고 말하더라도 순교의 역사를 배우고 가르쳐 간다는 것은 큰 의의(意義)를 가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순교사의 진정한 값은 다만 역사와 그 교훈에 그칠 수 없고 우리 가운데 분명히 살아있어야 할 한 신심(信心)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교사의 역사 내지 문화적인 가치를 찾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후세에 옳게 잘 전해주기 위해서는 우선 옳게 잘 알고 있어야 하겠음을 더 말해서 무엇하랴. 가령 손쉽게 얻는 문헌·사료에만 만족하지 말고 창의적인 머리를 써서 파묻힌 그것들을 조사해 내는 길도 있겠고 또는 비교 역사학의 깊은 연구를 통해서 순교사의 내용을 철저히 맺어가는 방도도 있겠다.
동시에 강조될 일은 그같은 조사·연구가 하루속히 학자와 연구실을 벗어나 민중의 수중에 들어오고 또 개방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어떤 철학이 상식의 철학이 되고 민간에 통용되었을 때 거대한 사상을 형성했었던거와 같이 순교사의 연구 또한 그것이 일반에 잘 알려졌을 때 크게 신심을 동원하여 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순교사를 옳게 잘 배움으로써만 동시에 잘 전해 내려줄 수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순교사를 배우고 가끔 들을만한 기회가 얼마나 흔하다고 할 수 있는가 얼른 살펴보기에 어른들의 대보다 새로 입교한 교우들이나 어린 대에 가서 별반 관심과 아는 바가 없음을 본다. 어른의 대가 더 알고 있다는 것도 강론이나 구전(口傳)을 통해서 들은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실정이니 대외적으로 알려줄 만큼 되기에는 참 요원할 뿐이다.
그 때문에 순교선열들의 숭고한 정신과 장한 행장이 오늘 우리들의 신심과 생활의 모범이요 또 현대에 절실이 요구되는 용덕(勇德)을 준다는 것을 강조하기 전에 먼저 광범한 순교역사의 보급(普及)이 필요할 줄 안다. 그 보급 방도의 수립이 시급한 것이다. 연중 복자첨례 하루나 강론을 듣는 정도로는 태부족하다기 보다 거의 망각해버릴 수 있다. 그것마저 어느 선교신부의 본당에서는 없이 지내는 수가 있다고 한다. 그 전에 시골본당에서 청년들이 곧잘 순교극(殉敎劇)을 했었는데 아마 그 계몽적 효과를 말하면 최선의 방법이었었다. 그것도 세태가 변하면서 열성이 식고 말았다.
요컨데 순교사에 대한 이해(理解)와 기민한 보급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그 방법은 시청각 교육과 같은 발달된 기술을 이용하는 길도 있다. 그 전에 열심한 교우가정의 구수한 순교사화(史話)가 결국 그들의 신심을 얼마나 간절히 길러줄 수 있었던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각 본당 가정학교에서는 한 중요한 교육 「플랜」으로 신중히 다룰만한 일이다. 한 번 이렇게 한 운동이 일어난 다음엔 우리도 남같이 순교하신 어른들을 찾아, 그 기념사업에 정성도 갈 것이고 그 방면에 반듯한 일을 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9월의 정성을 우리 치명선열들에게 돌리자. 바로 이 땅에서 피로써 신앙을 지켜준 그 분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 한 달을 또 한 번 거룩히 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