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은 우리의 연중신앙생활 가운데서도 고심극기와 통해보속에 전력을 경주하는 때인 동시에 그 어떤 회생(回生)의 의욕을 저 자연의 소생(蘇生)처럼 강력히 느끼게 해준다.
회생의 의욕, 그것은 반드시 재생(領洗로 말미암은) 및 그 개신(改新)을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국가사회와 민족적으로도 한번 더 그리스도교적 4순절의 기풍(氣風)을 진작(振作)하도록 통감케 해주는 바 있다.
한동안 유행하던 「인간개조」 운운하는데 붙여 우리는 그 정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나머지 적지 않은 기대를 걸어 본 적도 있었다. 그 동기의 소재를 밝힐 것 없이 한 민족의 거대한 부흥을 일으킬 수 있을만한 귀중한 「슬로간」으로 보기도 했었다. 지금 그 실책과 실망을 선언할 시기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한 정신운동에 대치한 진면목(眞面目)의 자세만은 심각히 반성할 여지가 있었다.
1945년 우리의 광복을 보았을 때 그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진정한 역사가 8·15에서 출발한다고 했었다.
이 말은 실로 민족적이요 역사적인 반성을 솔직히 표현한 것인줄 안다. 이른바 「君義臣忠」하고 「父慈子孝」하며 「朋友有信」하는 윤리적 질서하에서는 대개 유교에서 말하는 「君子」가 득세하고 「小人」이 실세하는 시대였다. 신라의 성세나 고려의 초 · 중엽까지는 대체로 이러한 시대인 것이다. 외견상 윤리 · 도덕이 엄격히 서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도덕적 인격적 요소가 일단 무너지면 그 명령, 복종의 생활관계는 단순한 상전대 노복(上典對奴僕) 혹은 노복대상전의 관계로 전락하고 마는 법이다. 고려중엽 이후나 이조후반기의 우리나라 정치사회생활의 내용은 한갖 이런 주노(主奴)의 관계에 불과했었다. 주노관계란 단순히 신분과 권위로써 유지되는 것이요 인간대 인간, 인격대 인격의 관계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의 생활에서는 상전노릇 하는 자는 언제나 명령하고 지배하고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즐기는 습성이 생기며 신분, 지위, 명예를 생명같이 알며 권위, 체면, 형식의 유지를 중요시 하는 버릇이 생긴다. 이런 사고와 행세를 곧 상전(上典)의 태도라고 하겠다.
이와 반대로 종노릇 하는 자는 위에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한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주성을 장만하려 하지 않으며, 그 하는 일도 자기의 일로 생각지 않고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에 대한 성의도 없으며 책임감도 없다. 자기의 대우나 지위의 향상은 자신의 성실과 노력보다 상전의 인정에 달려 있기 때문에 상전의 눈치 코치를 잘 알아보고 그 비위를 잘 맞추려 하며 그저 상전의 권세에 붙어서 자기의권세나 부려 볼 생각이나 한다.
같은 종들끼리도 상전에 잘 보여 윗자리로 올라가고자 서로 다투며 서로 모암하며 고자질 잘하고, 감시의 눈이 어두울새라 훔쳐내고 눈속임 하기를 잘 하며, 내 물건이 아니라 하여 마음대로 낭비하고, 아낄줄 모른다. 이러한 주노관계에 도덕적 인격적 발전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고려, 이조말기 이후의 부패 혼란한 정치사회생활 속에서 장구한 시일을 두고 이러한 사상과 행동의 버릇을 잔뜩 길러 왔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한 역사상의 지적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줄 안다. 저 당쟁사(黨爭史)만으로도 족히 방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전의 태도와 종들의 행실이 서로 다른 것 같으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리를 바꾸어둔데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랫것이 위로 오르면 사언이 되고 윗것이 내려서면, 노복이 되는 바에야 하등 구별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우리는 이러한 도덕상태 하에서 저 이족(異族) 통치를 당해 명실공히 민족적인 전면적 노복의 굴레를 쓰지 않았던가?
이런 뜻으로 우리의 진정한 역사는 이미 주노관계를 벗어나 한 인격을 찾은 8·15에서 창건해 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건전한 윤리도덕의 기반에서 그 일을 위한 맹성(猛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이렇게 근본적인데서 자기를 발견해가고 그 반성을 하기란, 특히 그 연유를 늘어 놓기란 한걸음이라도 실천에 옮기는 일만큼 어렵지 않다.
4순절은 먼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 모든 완전한 인격을 회복한 그리스도교도 그중에서도 지도급에 있는 자들에 「나」만이 아닌 전체적인 생활관계에 있어서 엄중한 문책을 당하는 때로 맞이하고 싶다. 그 실천방법은 항상 그 시대의 위기를 구출한 교회가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잠잠히 타일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