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성월인 9월달을 맞이하게 되면 해마다 내 머리에는 순교선조의 「이미지」 위에 6.25 때 붙들려가신 성직자와 교우 몇 분의 영상(影像)이 겹쳐져서 어른거린다.
9월26일 복자첨례날을 기해서 수도탈환을 복자들께 빌고 있을 즈음에 내가 아는 몇 분이 바로 그 9월달에 붙들려 가신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9월달에 들어서면 의례 생각나는 몇몇 분들!
먼저 성직자 중에선 방주교님-그 인자하신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다음 우신부님-안경알이 유난히 작은 것을 걸치시고 머리엔 운두가 낮은 「터기」 모자같은 것을 얹으시고 허연 수염을 휘날리던 그 풍채! 다음, 외모부터도 뾰족뾰족 날카로우시고 강철같은 이(李在現) 신부님-성심신부란 별호로 교우간에 존경을 받으시던 분이다.
버들같이 유순하시고 조용하신 유신부님, 구슬같은 눈동자의 소유자이신 정신부님 등등.
말구 조(趙鍾國) 회장 종현(鍾峴=현명동) 교회 총회장님으로 당시 서울 계시던 교우로서는 모르는 분이 없는 분으로서 그 공적을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다.
다음 송(宋京_)씨-종견가톨릭청년회 부회장으로 계시며 활약하신 분으로 매씨 몇분은 바오로회 수녀시고 그 부인께서는 지난 봄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 한다. 부군의 납치가 충격이 되어 얻으신 병환이었으리라 짐작되어서 더욱 가슴이 찌릿해진다. 다음 정(鄭南奎) 회장님 옛날 선비 「타입」의 성격이 아주 곧으신 분으로 양로원을 맡아가지고 애쓰시던 분이시다.
위의 세 분은 같은 날 밤에 차례차례로-다동(茶洞) 자택, 일지로(乙支路) 입구의 회사 사옥, 입정동(笠井洞) 자택 등에서-붙들려서 세 분이 같이 끌려서 넷째번에 우리 집 밖에까지 오셨던 것이다.
이 분들을 붙들고 온 무리(정치보위부원이라고 기억함)가 우리집 안팎을 샅샅이 뒤지며 일방 문초를 하기를 한 40분간 하다가 돌아갔다. 그때 캄캄한 밤중이어서 누구누구이며 또는 몇사람이었는지는 모르나 맨 뒤에 가던 분은 그 키라든가 몸매로서 정회장님이 아니었던가 싶다. 다음 김(金正熙) 회장님 바로 장(張勉) 박사의 처남되시는 분이다.
「아마추어」 건축가로서 명동의 가톨릭문화관을 이분이 설계하시고 지으신 것으로 안다. 다음 申·洪·金 등등 20·30대의 젊은 분들이 연이어 머리에 떠오른다. 이렇게 한 분 한 분 따라서 그 분들의 내력과 그 때 그 상황을 더듬어가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그런데 위의 몇분은 서울 장안 우리 천주교회 안의 인물 중에서는 그야말로 기둥들이셨고, 본보기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하필 이런 분들만 골라서 붙들려가신 것을 보고 생각해본다. 무슨 큰 안배(按配)가 있어서 그 분들만이 간택함을 받은 것이나 아닐까? 하고.
그러므로 이 분들을 그리는 마음 간절한 바 있으며 우리 교회가 오래오래 기억하고 이 분들의 덕을 간직했다가 후손에게도 전해주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세월은 흘러서 이 분들 가신지 벌써 13년이 됐다. 내 자신이 당한 일이건만 그 때 일이 어떤 장면 장면은 벌써 기억에서 흐려지기 시작한다. 내 머리가 나쁜 탓도 있겠지만 너 나 없이 흐르는 세월에 씻겨지는 기억력은 아무래도 어쩔 도리가 없는상 싶다. 이대로 몇 해만 더 가서 그 당시 직접 당한 우리들 자신의 기억도 흐려지고 혹은 죽어 없어지고 하면 다음 세대에서는 이런 사실이 있었는지 조차도 모를만큼 흐미해지지 않을까 하는 한가닥 서운한 불안을 금할 길이 없다.
백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이 허다히 치명하셨지만 지금 우리들이 알고있는 분은 오직 그 때 그 사적의 기록에 의해서 복자 79위를 위시한 몇 분 뿐 기록에 없는 그 많은 분들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과연 기록이란 중요한 것임을 새삼 느끼며 기해일기(己亥日記)를 비롯한 순교사기의 가치와 고마움을 되새기게 된다.
년 전에 전주(全州)교구에서 6.25 때 붙들려 가신 분들을 조사기록하는 일을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우리 서울대교구나 다른 교구에서는 아직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얘기를 못 들었다.
이 분들의 가족이나 친지 특히 그 때 일을 같이 다하셨던 분들이 살아계신 동안 또한 그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기록에 남겨둔다는 일은 우리 교회로서 결코 헛된 일이 아닐 것이며 더 나아가서 이것은 후세자손들에게 물려주는 하나의 요긴한 역사적 선물이 되지는 않을는지?
여러가지 방법이 많겠지만 우선 쉬우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말해본다면 「경향잡지」·「가톨릭청년」·「가톨릭시보」 등 중에서 약간의 지면을 할애해서 연속적으로 조사 모집한 것을 기재해 나간다면 우선 그리 큰 비용은 들지 않을 터이고 혹 어떤 시기에 가서 이렇게 해놓은 것을 모아서 엮어만 놓는다면 제2의 기해일기 「기해일기」가 됨직하다고 하면 과장된 말이라 할까?
하여튼 한 번 논의해 볼만한 일거리가 아닐까? 우리 목숨이 아직 붙어있고 기어력이 흐려지기 전에!
崔常善(필자=마리아의원 원장, 전 성모병원 냇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