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것이 늘 변하는 것처럼 언어도 끊임 없이 변한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옛글을 특별히 연구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학교에 고문(古文)을 가르치는 시간이 생기고, 고어사전(古語辭典)이 나오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들 것도 없이, 우리의 일상용어가 해방 후에 얼마나 변했는지 잠간 살펴보기만 하여도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해방 전이나 지금이나 「옥수수」라는 말이 표준어임에는 틀림없으나 「옥수수」 튀긴 것을 가리킬 적에는 전에 사투리었던 「강냉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말이 변해 나가는 데에는 언어학자나 문법학자들이 수긍(首肯)할만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도 없지 않지만 그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수가 더 많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언어정화(淨化)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들이 언어의 나아갈 길을 어느 정도 바로잡아 놓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대세를 아주 자기들 생각대로 움직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어쩔 수 없이 대세를 따라가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언어정화 문제라든지 언어의 순수성 보존문제가 아니고, 우리 교회의 기구문이나 요리문답에 쓰이는 말에 관한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에는 요리문답을 「알기 쉬운 말」로 고친 것이 1920년대였으니까 벌써 40년이나 되어서 다시 「알기 어려운 말」이 되었고, 경문으로 말하면, 요새 새로 만드는 것을 빼고는 언제 만든 것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라, 그 뜻을 이해하기가 몹시 힘든다.
가령 천주경에 『네 나라이 임하시며』라는 것은 『네 나라가 임하시며』라는 뜻인데, 지금 우리 말에는 모음(母音) 밑에 오는 제1격(格)은 「이」가 아니고 「가」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이것을 아예 「에」로 만들어 버려, 천연스럽게 『네 나라에 임하시며』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작은 예에 지나지 않고, 그보다 더 알기 어려운, 아니, 도저히 알 수 없는 말로 된 경문이 얼마든지 있고, 문답에도 뜻을 이해하기 힘든 말이 대단히 많다. 이것을 알아듣기 쉬운 말로 고치지 않고서는 「저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듣지 않을는지?
「로마」에서는 신자들이 집전(執典)하는 사제와 함께 「알면서」 미사를 드리게 하기 위하여 오랜 전통을 깨뜨리고 일반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 대신 각국에 지금 통용되는 말로 미사 경문을 고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하물며 전례용어(典禮用語)도 아닌 우리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고치는 것은 시급하지 않을까 한다.
安應烈(外國語大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