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21일 우리나라 주교님들은 다시 「로마」로 떠나신다. UN에 참석하는 한 외교단도 아니요 우리의 빈곤을 세계에 호소하여 국민의 굶주림을 풀어주기 위한 경제사절단도 아니다. 맡으신 교구 내에서의 가톨릭의 신앙의 증거인으로서 「로마」로 가신다.
세계적 기구라고 볼 수 있는 UN을 볼지라도 국가적인 이해관계로 「부록」을 형성하고 의제에 관한 토론과 표결도 약소민족 강대국이란 현세적 경제적 가치 추구의 명예에 억눌려 좌우된다.
교회가 비록 인간을 성화하고 천주께 인도하는 종교적 초자연적 가치를 추구하는 단체이기는 하되 역시 육체를 가진 볼 수 있는 현세에서 움직이고 있는 인간들로써 구성된 단체이다. 즉 가관적(可觀的) 인간 조직체이다. 그렇지만 다른 단체와 달리 각 주교는 그 맡은 가목구(可牧區)가 적고 크기나 부하고 빈하거나를 막론하고 다 똑같은 권위로써 발언하며 투표한다.
민족, 국가, 풍속, 문화를 달리하는 세계 각지에서 집합한 주교님들이 유일하고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 같은 권위로서 강하고 약한 차이 없이 의론 재정한다.
공의회의 목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을 천주께 인도하는 교회의 사명을 시대에 적응하여 수행하기에 필요한 신앙과 논리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데 그 전통적인 의의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끔 많은 이들이 공의회를 명백히 인식치 못함으로 즉 변치 않는 것과 변할 수 있는 두 가지 면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 가운데는 공의회에 참석하시는 추기경과 주교들을 보수파 진보파란 딱지를 붙여 생각하는 이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어느 공의회나 그랬듯이 이번 공의회가 본질적으로 불변의 교리와 다른 어떤 신기한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대에 맞추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어가면서 시대가 주는 위험에서 신자들을 보호하고 신앙생활을 완전히 하도록 하는 길을 영구하고 탐구하는 것 뿐이다.
1869년 제1회 바티깐공의회 이후 근 1백년간 두 번이나 겪은 세계대전과 급진적인 과학발전으로 생활양식과 정신상태까지 달라지게끔 되었다. 거기서 파생되는 특이한 사회환경과 위험한 사상의 물줄기는 크게 보아 가톨릭 신앙과 윤리원칙에서 거리를 멀리하고 나아가서는 공격의 태세까지 취하고 있다. 교회가 이룬 사회 혹은 사조에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으며 신자들이 취할 태도와 걸어가야 할 길을 지시해 주어야 될 것이다. 여기에 이번 공의회의 의의가 있다. 근 2천년간 교회는 오직 스무번의 공의회를 가졌을 뿐이다. 또 그만큼 오늘의 가톨릭자는 제2 바티깐 공의회를 통해서 역사를 꾸미는 특은을 입었고 거기 상응하는 오늘의 시대적 중대성과 복잡성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천주의 섭리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통해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은 물론 진심으로 옳은 행복을 찾는 무신앙자들이 함께 더 많은 천상강복을 받을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모든 주교님들이 교황 성하를 둘러싸고 천주의 인도하심을 빌며 의논하는 광경은, 수종도(首宗徒) 베드루를 둘러싸고 성신을 기다리던 첫 「강림」(降臨) 즉 교회의 「다이나미슴」이 싹트기 시작한 그때를 우리는 연상치 않을 수 없다.
이를 공번된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 각자는 한국이란 국가적 배경을 갖는 가톨릭자(者)다. 따라서 모임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교님들의 뒤를 따라 정신과 마음으로 「로마」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참석할 권리와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될 줄 안다.
어떤 문제가 상정되고 논의되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한 가지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번 공의회가 『한 주시요 한 신앙이며 한 성세』(에페소 6-5)를 전할 것이고 『하늘로부터 나린 천신일지라도 전통적 교회가 전하는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가라타서 1-8) 서슴치 않고 저주를 받을 것을 선언할 것이며 『어제도 오늘도 또한 영원토록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헤브레아서 13-8)를 외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