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날 미사시간에 흔히 보면 한 걸상에 7명이 앉는 것이 보통인데 애긍을 거두는 바구니가 돌아갈 때는 7명 중 3명쯤은 얼마간의 애긍을 넣지마는 나머지 4명은 애긍을 거두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상에 잠기거나 경문을 읽기에 열중함인지 모르고 지나간다. 또 다른 교우는 애긍 바구니가 안 줄로부터 돌아서 점점 자기가 앉아있는 줄로 올 때를 기다려 애긍을 하는 교우가 있다. 이런 교우는 미사시간에 분심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일 묵상과 경문을 읽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자기 집에서 또는 미사시간 외에 성당 안에서 하는 것이 일층 잡념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사시간에는 신부님의 강론이 있을 때도 강론을 들을 것이요 예절에 따라 신부님의 미사 드리는 것과 호흡을 같이하여야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고교시대에는 미사에 양을 천주님께 바치던 것은 아둑한 옛날이거니와 그 후 자기들의 농작물로된 식료품을 천주님께 미사에 바치고 그리고 지금까지의 천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앞으로의 축복을 기구드리며 이러한 물품들로 교직자 즉 신부님들의 생활이 여기에 의하여 성전을 기리 보존할 수 있게끔 하는데 거룩히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오늘날의 애긍과 교무금은 이것이 현대생활이 복잡해짐에 따라 현대화하였음에 불과한 것이며 그 본질에 있어서는 옛날의 그것과 도무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때 천주님께 지나간 한 주일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지 않고 말로만 감사하다고 하면 족할 것인가? 아무리 어려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활이 곤란하기 때문에 한푼도 애긍에 내놓을 수 없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얼마 이하는 애긍으로 내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조건이 없는한 납득이 안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도 말로 감사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말뿐으로 족한 것이 못 되고 계란 한 개로라도 성의를 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은 절반은 정신적이고 다른 절반은 물질적이기 때문에 이물질적인 존재인 우리의 몸에 건강을 유지하며 생명을 유지하는데 이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부님을 비롯해서 모든 교직자도 사람의 몸인만큼 이분들에게도 건강을 유지하며 활동케함에 있어서는 또한 물질이 필요하며 교회 내 모든 사업이 물질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한면으로는 『너희들은 재물을 썩지도 않고 도적당할 염려가 없는 하늘에 쌓으라』하신 성서에 의하더라도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의 신앙에 들어간다고 하며는 우리들의 수입에 얼마간은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이겠고 옛부터 자기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바치는 신자가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의 오늘날 교회의 바치는 물질은 너무도 적다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 친구 한 사람이 대구 「파띠마」 병원에 입원하고 있어 방문할 일이 있는데 그 병원의 유래가 오지리의 우리 교우들이 한 끼 먹지 않고 굶어 절약한 돈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실로 이분들은 천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재물을 하늘에 쌓은 분들이라고 느껴졌다.
또 때때로 체납된 교무금을 아직도 내지 않는 분에게 대하여 납입하기를 권고하는 것을 듣고 있는데 물론 이 가운데는 사정이 딱한 분도 있을 것이므로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나 그러나 이상의 말한 몇가지를 가슴 깊이 새겨서 생각한다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어려운 살림 가운데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만을 제 때 제 때에 납입함으로써 영원한 세계의 신앙에 걸어나가는데 구기는 마음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금년에 가족들의 권유에 이기지 못하여 동화사에 간 일이 있는데 절간 입구에서 스님이 일인당 오원씩 꼭꼭 받고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라서 사면을 돌아보니 문교부 지시에 따라서 문화재 보관비의 일부로 징수하게끔 되어 있었다. 나는 이런 일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관람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간 이상 그것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그 건축물이 돈 없이 보관될리 없을 것이므로 설사 그 사람들이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또 결과적으로 역사적인 건물을 보존하며 또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기회를 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어찌 고맙습니다고 하는 말만으로써 족할 것인가.
돌이켜 우리 교회를 생각할 때 여기서 움직이고 있는 모든 교직자와 모든 건물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다 나의 영혼을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가 주일마다 고맙다는 마음 뿐으로 족할 것이 못 된다.
신앙생활과 관련이 없는 저 절간에 대해서도 그러하거늘 우리 교회의 신자로서 교회의 유지와 교직자들의 생활과 또 그들의 교회를 위한 사업에 대해서 어찌 말만으로 또 마음만으로 족할 것이 되겠는가?
비오는 어느날 신부님이 푸대를 매시고 대문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흡사 「싼타크로스」 할아버지를 연상하였는데 때는 무더운 8월이고 너무도 젊으시기 때문에 「싼타크로스」 할아버지와는 닮지 않았다. 그래 황송히 맞으려 했으나 들어오시려고 하시지 않고 문턱에 앉으셨다. 말씀 들으니 울릉도의 수재민 우리 교우들을 위하여 교회에서 모금을 해보아도 도무지 얼마 걷히지 않을 뿐더러 교우들이 여기에 관심이 적은 것 같아서 울릉도의 불쌍한 교우를 위해서 도저히 앉어 배길 수가 없기 때문에 안 된 줄 알면서도 동냥자루를 매고 나섰다는 불평 아닌 성심의 호소를 들었다.
이 때 나는 부끄러운 마음보다도 울고싶은 느낌이었다.
그 뿐인가 지금까지 여러 교우댁을 방문한 결과 예외로 어려운 분이 자기의 새 옷을 내놓은 감격할 분도 있었지만 극히 보잘 것이 없었고 도리어 신부님이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반문하며 못마땅히 여기는 교우조차 있는듯 느껴졌는데 이런 일은 우리들이 교회 내 운동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겠고 신부님들에게 이렇게까지 수고와 염려를 들이는 것은 안 되리라고 생각하며 주일 미사참례와 신공만으로써 만족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느껴졌다.
끝으로 우리 가톨릭은 믿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 못 되고 실행이 대단히 중한 것으로 일상 신부님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오니 만큼 교회의 모든 규칙에 따라 모든 교리에 열중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또한 우리들이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마땅히 감당하여야 할 교회를 위한 또 교회 사업을 위한 물질적인 부담에 어려운 짐을 메고 나가는데 게으름이 없어야 비로서 완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宋明道(대구 송명도 산부인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