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장마와 숨막힐듯한 더위도 가고 그야말로 선들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로 접어드어 지칠대로 지친 몸과 마음이 훨씬 가라앉는듯한 느낌이다.
가을은 분명히 고달픈 인생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 주는 계절인가 보다.
삼남지방에 폭우와 산사태로 말미암아 수많은 동포들이 생명을 잃고 가옥과 농토를 유실당하는가하면 쌀값을 비롯해서 모든 물가는 천정을 모르게 뛰어오르고 쥐꼬리만한 수입으로 염두도 못낼 고달픈 삶에 지칠대로 지친 군상들이 거리에도 골목에도 늘어만가던 올여름의 숨가쁜 고비도 이젠 한숨 넘어간 듯한 감이 든다.
오곡이 무르익고 풍성한 과일과 야채가 구미를 돋구게 하는 가을철이오니 한결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듯하다.
그런데 웬일일까? 여전히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더욱 무거워만가니 말이다. 이제 얼마 있으면 햇곡식이 쏟아져 나오고 모든 것이 풍족한 결실을 가져다 줄 것인데 어찌해서 이렇게 마음이 무겁기만 할까. 쌀값이 약간 고개를 수그린듯 하지만 여전히 물가는 올라가고 일반 서민층은 못살겠다고 아우성들을 치고 있는데다가, 선거를 앞두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은연 중에 조성되어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히게 하는 때문일까.
밝고 높은 가을 하늘을 바라다보며 잠시나마 시상(詩想)에라도 잠겨보지만, 이것은 너무나 순간적이요 피상적인 감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확실히 생활의 「유모어」를 잃었고, 절박한 생존경쟁의 포로가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고 포학해져가는 이유도 여기 있으리라.
생에 대한 아무런 의욕도 목표도 없이 그저 그날 그날을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 인생일까? 그렇다면 인생은 너무나 공허하고 허무한 존재가 아닐까! 인생은 그야말로 초로(草露)요 일장춘몽이 아닐게다. 영원한 행복과 삶에 대한 끝없는 욕구는 인간 본성에 뿌리깊이 박혀있음이 분명하지 않는가!
『자연은 헛된 것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끝없이 살고 행복하고 싶은 인간의 근본적 욕구도 분명히 여기 적합한 대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세에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또한 어떤 것에서나 이것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내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 아닐까? 빵으로만 살지 않고 신앙과 진리로써 살아가는 「그리스챤」의 영생과 영복에 대한 희망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가을 하늘은 한없이 맑고 높기만 하다. 고달픈 인생여로에서 지쳐버린 우리에게 현세를 초월한 어떤 희망과 결실을 약속해 주는 듯하다. 내일을 위해서 또한 영원한 내일을 위해서 삶의 보람을 느기고 오늘도 하루를 흘려보내련다.
尹炳熙(서울 祭基동본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