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木), 한국 치명복자 79위 첨례를 맞이한다. 월초에 9월의 정성을 순교자 현양에 바치자고 강조했거니와 그 정성을 절정(絶頂)에 올릴 바로 그 본날에 다가서게 되었다.
한국 복자 79위 첨례를 1등 첨례로 승격시키고 그 외부행사를 다음 주일에 행하도록 된 것이며,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의 첨례를 7월5일로 옮기는 동시 1등으로 올리고 그 외부 행사를 다음 주일에 행할 수 있도록 된 것은, 순교자 중앙위원회에서 먼저 전국 모든 신부의 의향을 문의하고 이 사항을 한국 주교회의에 보고하는 동시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므로, 주교회의에서는 교황청에 이를 청하여 그 허락을 얻었던 것이다.』 (한국 가톨릭 指導書 182_)
그러니까 금년은 26일 목요일에 맞이한 복자첨례의 외부행사를 29일 주일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행사란 어떤 드러난 성과를 목표삼은 단체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순교 정신 및 순교사를 일반에게 알릴 수 있는 기념강연회를 공개리에 개최하고 그것을 신문·라디오를 통해 전달하는 방법도 있고, 거기 연극 음악회 등을 겸한다면 한층 다채로울 수 있을 것이다. 순교정신이나 신심면은 강론 중에 들을 수 있겠으므로, 그 방면에 연구와 조예가 깊은 인사를 초빙해서 순수한 역사면에서 사실(史實)을 듣는 것도 좋을 줄 안다.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전기는 환등용 「슬라이드」가 있다.
이렇게 외부행사를 주일로 미루어서 하도록 권하는 본 취지를 잘 살려가야 할 줄 안다.
이런 뜻으로 복자첨례 다음 주일은 마치 「순교자 현양(顯揚)의 주일로 맞이할 만하다.
지금 순교자 현양사업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드높으며 그 계획이나 추진 상황이 활발하다.
그 활동은 한국 순교자 현양회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순교자 현양회가 창립된 것은 1946년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 백주년을 맞이한 해이었다. 현양회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게 된 것은 1939년 순교백주년(己亥年 大敎難)을 당하여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를 창립하려고 했었으나 일제(日帝)의 금지를 받았던, 참으로 유서깊은 이름인 것이다. 여기서 동 창립 취지문을 되새겨 보자. 『우리는 이(순교자)들의 원통한 죽음을 이 나라에 공식으로 설원(雪寃)시키기 위하여도 이들을 현양할 필요가 있고, 또 이들의 장렬무비한 순교를 높이 표창하기 위하여도 이들을 현양할 필요가 있고, 또 이들은 진실로 만고에 빛나는 영웅 열사 열녀이요 이땅에 천주교의 기초를 세워놓은 우리의 조선(祖先) 우리의 위대한 은인이므로 이들을 현양할 필요가 있고, 또 천주를 위하고 교회를 위하여 백절불굴의 기백으로 흔연히 생명을 초개처럼 버리는 그 순교정신을 앞으로도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그 순교 정신을 상속받기 위하여도 이들을 현양할 필요가 있고, 또 무수한 순교자들의 선혈로 증명된 가톨릭 진리의 태산같은 권위를 일반 사회에 들어보이기 위하여도 이들을 현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1만명 순교자들의 뜨거운 피에도 녹지 않는 심장을 가질 수는 없다!』
1만명 순교자들의 뜨거운 피에도 녹지 않는 심장을 가질 수 없다. 이 얼마나 폐부를 찌르는 전규요 호소이겠는가?. 그 반응은 결코 적지 않았었다고 본다. 동 현양회 취지에 찬동하는 가입회원수는 해마다 늘어갔었다. 그러던 것이 잠시나마 상임(常任) 부서의 변동으로 소강상태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동 사업의 전망은 큰 기대를 걸 수 있으며 만일 그간 무관심(?) 했었던 반동(反動)의 힘을 모둠해서 전국적인 성원이 보태어 진다면 단 시일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줄 믿는다. 또 만일 동 현양회가 한국에서 학계(學界)와 문화계(文化界)에까지 뚜렷하며 엄연한 존재가 된다면, 교회가 바라는 적극적인 사회참여(社會參與)의 한몫을 담당할 수도 있겠다.
복자첨례는 윌에게 순교정신을 깨우쳐주는 동시에 한편 우리 민족의 진리(眞理)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통한 큰 자부심을 주는 바 있다. 문화민족이란 소중(所重)한 것을 길이 간직할 줄 아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면, 그 소중한 것 가운데서도 정신적인 것을 더욱 소중히 간직해가려 할 때 거기 동원되는 일들에 정성과 물질적으로 베푸는데도 인색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