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증가를 위한 기도의 「세계데이」를 맞이하여, 교황 바오로 6세는 성소증가를 위한 세계적인 기도의 날을 처음으로 설정하고 앞으로 해마다 부활 후 제2주일에 세계적으로 이를 거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연학성성(硏學聖省)은 이 「세계데이」의 설정은 사제직과 수도생활을 위한 성소를 높이고 증가시키는 것이 성하의 항구한 사목적관심이라는 것과 이날의 본 성격과 영적 목적을 잘 이해하여 참으로 세계적인 기도를 천주께 바치는 날이 되도록 하자는 것과 이날의 행사가 전부터 있던 신학교 지원(支援)운동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우리는 교황의 이 뜻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바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성소의 부족을 느끼고 있다. 우리 나라는 다행히 비교적 성소가 좋은 편이나 성소가 아무리 많아 하더라도 1군(郡)에 신부 한분의 비율을 이상으로 하고 또 국토통일을 고려에 넣을 때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에는 교사(校舍) 부족으로 있는 성서마저 잘라버려야 할 형편이었으나 지금은 서울과 광주에 대신학교가 있고 서울과 또 건립중에 있는 대구의 소신학교에 더 많은 성소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신학생은 예수의 제자처럼 직접 그의 소리를 듣지는 아니한다. 다만 신부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신부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를 동경하는 것은 일시의 감정이다. 신부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그 종교상의 뜻이 무엇이며 그 직책이 많은 희생을 요한다 할지라도 영혼의 기쁨을 느끼는데 있다. 『신부는 취직난이 없고 존경을 받고…』이 생각은 부족하다. 생활난을 면하기 위해 신부를 지원하는 것은 사기다. 신학교나 수도원은 인생의 패배자의 피난처가 아니다. 좋은 전쟁을 하는 제일선이다. 세상은 흔히 「트라피스트」나 「갈멜」에 들어가는 처녀들을 실연한 자로 보는 모양이다. 소설과 영화에 백의의 미녀가 나오면 의례히 그렇게 줄거리를 꾸민다.
『어떠한 동기로…』하는 질문도 틀린다. 무슨 극적인 이상한 동기가 없으면 신부가 못되고 수도자가 못된다고 말할 수 없다. 드물게는 어떠한 사건에 직면할 때 인생을 바로 잡고 그것이 신부 수도자 지방에 동기가 되는 수도 있으나 그것은 도리어 예외이다. 보통은 신앙과 열심은 참으로 견고한 결심을 가져온다. 일시의 감상은 건전치 못한 병증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신학교나 수도원을 지망할 때 평소의 신심과 그의 경향에 조금 주의해보면 넉넉하다. 부모의 열심은 제2의 문제이다. 자녀만 열심하면 된다. 신심이라 해도 반드시 성인의 그것이라야 하는 법이 없다. 좋은 신심이면 족하다. 신심이 조가더라도 머리가 부족하면 곤란하다. 건강이 불증한 이도 희망이 없다. 건강하고 신심있고 총명하면 훌륭한 후보자이다. 부모의 강제로 그를 지원케 할 수도 있으나 좋은 결과를 못낸다.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자가 제일 믿음직하다.
십대의 동요기를 지난 사람과는 물론 같이 취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아이야말로』하고 생각되는 소년 소녀에게 그 지망을 권고해 보는 것은 강제가 아닌 정도로 좋다. 건강하고 열심하고 재주있는 아이는 한 집의 태양이다. 이 태양이 천주의 부르심을 받고 집을 떠나려고 할 때 반대하는 부모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가 숙고한 띁에 비장한 결심을 한 것을 반대하려고 할 때 무리가 있다. 성공 못하고 중도에 폐인이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할 수도 있다. 물론 신이 아닌 이상 장래사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장래사를 알 수 없다면 비단 신부되고 수도자 되는 일 뿐만 아니라 만사가 마찬가지가 아닌가. 지금 당장에 위험이 없으면 그것으로 안심할 수 밖에 없다. 설령 불행히도 측량할 수 없는 원인에서 중도에 방향을 바꾸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으로서 폐인이라 할 수 없다. 신학교나 수도원에서 배우는 것은 상당하다.
이상에 불타면서 노력하는 씩씩한 하루가 얼마나 거룩하고 축복받는 생활인가 짧은 인생에 다만 하루라도 그러한 날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자를 위해 결코 「마이너스」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권위를 너무 강조하는 나머지 자녀를 압박하면 재미없는 결과가 나온다. 부모보다 천주가 더 중하다. 『나를 따르라』하신 말씀을 들은 아이는 옛날에 베드루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듯 천주성의를 완수하는 것이 대국적으로 본 효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지러운 조국의 장래 정신면을 누가 개혁해야 하는가를 우리 신자들이 생각해야 할 근본문제라 본다. 오늘까지 우리나라 포교를 위해 얼마나 많은 외국인이 청춘의 몸으로 영웅적 일생을 바쳤는가 우리가 이 눈으로 친히 보았고, 또 현재도 보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잊어버린 것일까. 자기를 위해 바친 희생을 아는 자가 자기도 희생할 줄을 두려워해서는 아니된다. 오늘의 교회를 보고 어제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아니하는 자는 내일의 교회를 위해 자기를 바쳐야 한다. 신학생과 수도자를 보내자. 오늘 「세계데이」에 성하의 뜻을 받들어 성소증가에 우리나라가 앞장서자. 오늘의 좋은 신학생 수도자는 내일의 종도이다. 마지막으로 부모는 성직을 지망하는 자식을 절에 맡기다 싶이하고 돌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교육을 맡는 이는 물론 교회이다. 그러나 먹니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모의 책임이다. 또한 우리의 신학생을 양성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 신자의 책임이다.
우리는 순결한 마음에 싹튼 젊은이의 천직을 존중하자. 이미 그 길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뒷걱정을 없애주자. 신학생이 조국에서 아무 걱정없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방인신부를 통해 우리 동족이 가톨릭의 무한한 보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