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 나를 보내심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셨으니 사제가 스승의 운명처럼 수난을 당한다고 마다할 수이 없겠지만 수난하는 사제를 볼 때마다 애처럽게 여겨지는 것도 인간의 상정이랄 수밖에.
예수님의 수난도 가지가지였으니 사제의 수난도 한두가지만이 아니다. 가장 잦고 가장 심한 수난을 꼬집으라면 유다스편에서 가해지는 수난이리라.
현대판 유다스는 어디를 가도 우굴거리지만 첫째 유다스보다 오히려 「바리세이」적이라는 특징을 소유한다. 흔히는 열심한체하고 가장 협조적인 체하는 회장급에서 때로는 11대1의 만찬방 비율을 돌파하고 위세를 떨친다.
사제로서 유다스의 배신을 안 받는 분이 거의 없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 될지도 모르지만 제법 흔한 일임에는 틀림 없다.
유다스의 출현이 교회에 백해무익한 현상일진대 유다스를 근절까지는 몰라도 극소수로 감소시킬 필요는 절실하다. 사제들의 수난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유다스」하면 30은전을 연상한다. 현대판 유다스도 근본은 역시 돈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교회나 사제를 이용해서 물질적 혜택을 받으려고 사제와 가까운 위치에서 사제를 보필하는 형식으로 접근해온다. 물질적 이득에 성공하면 아부를 계속한다.
그러나 사제가 눈치를 채고 유다스를 성급하게 제거하면, 당장 유다스의 정체가 드러난다. 심할 때는 사제가 사회적 매장까지 당해야 한다. 애처러운 현실이다.
이런 불행을 미연방지하려면 교회행정에 적잖은 신경을 써야 한다. 유다스의 후보자는 항시 아첨의 표본인즉 아첨에 속지 않으면 만사는 「오케이」. 동시에 교회는 물질적 면에서 신자들의 이용물이 아니라 반대로 신자들이 교회를 살리고 신자들이 봉사해야 하는 조직임을 철저히 인식시켜야 하겠다. 교회를 이용하려는 생각조차 나지 않도록 측근자들을 교육해야 하겠다. 사견이기는 하나 교회의 경리는 좀 괴롭더라도 본당신부가 직접 취급하고 정기적으로 모든 교우들에게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무위원회나 회장단에게 경리일체를 맡기는 것도 좋기는 하지만 그런 단체 속을 유다스는 노리고 있다.
견물생심이란 말도 있으니 아예 견물의 기회마저 없게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전통이 없는 곳에 이런 전통을 세우는 사제는 적잖은 수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정도의 수난은 유다스의 출힌보다 훨씬 가볍고 쉬울 것이다.
오늘 이 순간에도 유다스의 배신을 슬퍼하는 사제에게 천상 스승의 위안이 내려지기를 빌고 있다. 또한 유다스의 회두도 잊지 않고 조석으로 빌리라.
金南洙(釜山西面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