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현양회에서 우리 본당에 나와 지난 주일 하룻동안 전시회도 열고 녹음 「테프」도 틀고 복자회 수녀님이 입회접수(入會接受)도 하고 회장되는 최 안드레아 신부님은 직접 진두지휘(陣頭指揮)를 하며 미사 때마다 열렬한 말씀으로 강론도 하며 입회(入會)를 권유(勸誘)했다. 본당 신부님도 적극 지원하며 교우들에게 권유한 보람으로, 많은 교우들이 입회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틈에 한몫 끼어 입회를 한 것이다.
복자현양회가 생긴지는 내 기억이 아득하리만큼 옛일에 속하는데, 이제서야 겨우 입회를 했으니 부끄럽다. 일상(日常) 신공범절, 사규성사는 말할 것 없고 한 달에 한 번 정도쯤 고해, 영성체도 하며, 한 때 청년회니 뭐니 하며 일을 한답시고 설치며 돌아가기도 했었고 요새도 교회의 무슨 때라면 가끔 얼굴을 내밀기도 하는 정도의 인물(人物)이란 것이 지금에야 비로소 입회를 했으니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윤(尹) 마두 신부님이 현양회를 맡고 있을 때에 가끔 만나는 친지(親知) 「구룹」에서 『현양회 사업을 도와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얘기가 되어가지고 몇 번 모이기까지도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여러 가지 사저이 여의치 않아서 성사(成事)는 못하고 흐지부지 되고만 일이 있었는데, 아무튼 그러한 일까지 있었으면서도 입회만은 역시 흐지부지 안 했는지 못 했는지 입회를 하지 않은채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주제에 최신부님을 만나서는 『신부님 참 수고하십니다. 벌써 이러한 수고를 하셨더면 많은 회원을 얻으셨을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현양회 자체가 활발하지 못했던 것에만 나의 입회지연의 책임을 슬쩍 돌리는 말투로써 변명 겸 인사 겸 얼버무리고 돌아서니 나의 핑계가 또한 부끄러웠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보고 현양회에서 나왔었다는 얘기를 하며 다음 미사에 가거던 입회를 하라고 권하는 말을 했더니 아내는 한술 더 떠서 현양회란 것이 『요새 새로 생긴 것』 쯤으로 알고 있지 않는 것이었다.
『신문교우도 아닌 당신이…』하며 한 마디 핀잔을 주고나서 생각해보니 아내는 그래도 몰라서 여지껏 못 들었던 것이 아니냐 하는 변명할 여지나마 있으니 나보다는 덜 부끄러운 처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내 역시 현양회가 지금까지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점만은 아무래도 정당한 변명거리가 없을상 싶으니 또한 부끄러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최신부님 말씀을 들어볼 것도 없이 현양회가 할 일이 이만 저만이 아니란다.
기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오다 바라보이는 「새남터」의 기념탑이란 것이 함석을 붙여서 임시로 정말 임시로 1·2개월만 세워놓는 거리의 선전탑 정도의 임시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몇 해를 지내고 보니 아주 추잡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절두산(切頭山) 위의 탑과 노천제대(露天祭臺)를 신의주에서 월남해오신 백씨(白氏) 형제의 정성으로 세우게 된 것은 고맙고도 한편 부끄러운 일이라하겠고 그 아담한 탑과 어울릴만한 주위환경의 미화작업이 아직 덜 된 것이 또한 민망하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도 순교사료(史料) 수집, 순교자 기념관, 시복(시福) 시성(시聖)의 추진 등등 실로 어마어마한 일거리가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껏 무관심 무성의한 나 자신 정말 순교선조(殉敎先祖)께 천당에 가서라도 뵐 면목이 서지 않을 것 같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부끄러워서 이름조차 밝힐 용기가 없다.
-編輯者註 필자의 이름을 본인 승락 없이 기재하였읍니다.
崔常善(서울 용산본당 성모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