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여기저기 과잉충성(過剩忠誠)의 폐단이 적지않게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정치외교의 면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상(思想ㅅ)면에서도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사상사(思想史)가 대체로 외래사상의 수용섭취(受容攝取)를 그 중요 줄거리로 해왔는데, 그 수용태도에 있어서 우리 조상은 곧 잘 과잉충성을 부리곤 하였다.
뭐 두드러지게 제것이라는 것이 없다보니 새로 들어오는 것이 고맙지 않을 수 없고, 그 새로 들어온 것이 대국(大國)의 것이고, 제법 근사하고 또 국물도 있으니 그것을 어찌 좋아라 하지 않으랴-.
민족적 「엘리트」들이 지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서기 6세기경이라 한다면 그들의 관심은 약간의 마찰이 있은 뒤에 불교가 들어오자 곧 그것을 맹종하였고 수세기가 불교일색으로 덮혔다. 당시의 선진대국 중국에 유학을 다녀오면 일약 권위와 영광이 그의 것이 되었었다.
이조(李朝)가 그 집권 초기에 배불숭유(拜佛崇儒)를 강행하니까 중국의 유교는 어느새 우리것처럼 그 세도를 다 했고 불교는 마치 아무런 세계성도 가지지 못한 미신이었던양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상이건간에 일단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온전히 우리 것으로 되살아나지 못한 것은 지나간 우리 사상사(思想史)의 한 특증처럼 되어 버렸다.
대국풍조에 대한 과잉충성, 전래(傳來)한 경전(經典)에 대하여 감히 독창적인 주소(註疏) 하나 변변히 못낸 우리의 지난날 사상계가 서글프다.
몇 그 예외를 빼놓고 뭐 이렇다할 새로운 사상적 기여를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우리는 이 민족의 과잉충성적 아부근성으로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 근성은 이 민족이 타고난 사고력, 창조력의 빈곤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맑쓰가 말하는 것처럼 경제적 하층구조의 취약성(脆弱性) 때문일까? 하여튼 무엇이 무척 결핍되어 있은 탓이리라.
이제 우리는 「트위스트」나 「쟈즈」를 모르니 비문화인이 될 지경이다. 과잉충성의 심리는 또 억지로 문화인 행세를 하기 위해서 썩은 냄새나는 「치이즈」를 먹고, 천한 잇발을 드러내어 애교를 떠는 심리 바로 그것이다.
箕永(도마.동국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