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를 마치고 성모당 주교댁을 감도는 길을 어떤 때는 혼자 생각하면서 어떤 때는 동무신부와 얘기하면서 흔히 산책한다.
그러자면 성모님께 저녁인사를 드리려고 성모당으로 올라오는 교우들과 가끔 마주치게 된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같은 길을 동무신부와 걸어가자니 두 할머니가 성모당으로 올라오다가 우리와 마주쳤다.
그런데 수단과 띠를 띤 나는 본채만채하고 수단도 입지 않은 신부님겐 공순히 인사를 했다. 나는 속으로 섭섭했다. 의례 교우이니 나이가 많으나 적거나 신부인 내게 인사를해야 한다는 판단밖에 못 하는 나의 편견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젊은 학생은 모르겠거니와 열심한 할머니들한테서 당할 때 나는, 좀 곰곰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이 되기 전에 하급생들이 상급생들에게 경례를 하지 않으면 당장 그 자리에서 따귀를 얻어맞았다. 어른들에게 길에서 인사하지 않으면 상놈이란 듣기 싫은 말을 들었다. 교우가 신부께 인사하지 않으면 냉담교우나 된 것처럼 이상하게 보였다.
즉 옛날엔 존경심을 어떤 외적형식(外的形式), 짜여진 「틀」로서 배양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마음 속과 달리 표현하는 이중성격을 만들어낸 감이 있었다. 그것이 틀린 방법이었다. 너무 겉치레만 했다.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지금 많이 바뀌어졌다. 경례를 않는 하급생을 꾸짖거나 뺨을 치는 상급생이 없고 젊은이들이 인사하지 않는다 해서 상놈이니 몹쓸놈이니 애타게 여기는 어른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면 옛날의 형식적이 아니고 지금의 최현대식인 이런 인간상호관계가 과연 옛날의 형식적인 것보다 더, 없었던 내적(內的) 존경심을 표현하는 인사방법일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속으로만 존경하면 된다는 이런 방식도 틀린 것 같다. 예의란 인간행위나 인간의 행위라면 크거나 작거나 정신적 요소와 육체적 요소가 함께 표현된다. 이렇게 보면 구식예의나 신식예의나 그 방법이 다 틀렸다면 인간행위의 한쪽에만 너무 치중했기 때문에 그랬다.
속으로 어떤 이를 존경하면 반드시 볼 수 있게 표현이 되고 예의를 상징하는 외적 행동을 거듭하는데서 저절로 마음 속에도 존경심이 생기는 법이다. 오늘 우리는 너무 형식적이어서는 안 되다는 생각에서 외적 예의를 무시하는 폐단이 많은 분위기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좀 잃어버린 이 볼 수 있는 인사차림을 찾아야겠다. 그러나 옛날의 형식화가 재현돼서도 안 될 것이다.
상급생은 하급생을, 웃어른은 아랫 사람을, 신부는 교우를 먼저 사랑하고 위해줌으로써 그들이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하고 인사하도록 해야 옳을 것 같다.
李甲秀(대구대교구 학연 지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