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은 연령성월이다. 낙엽의 가을이 겹치기도한 전례의 한 해가 끝나려고 하는 이 시절은 우리로 하여금 세말(世末)을 묵상케 한다. 죽음의 전례는 우리 본당 생활에 가장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 큰 본당에서는 한 주일에도 여러번 장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본당신부들은 이 예식에 귀한 시간을 빼앗긴다고 그러나 우리는 여기 이의(異議)를 달고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목적인 반응이 가끔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할 때가 있다고 본다. 여기서 근본적인 원칙 몇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원칙. 죽음의 사목(司牧)은 죽은이라고 하는 한 가지 중심 인물을 가지고 있다. 목자는 살아있는 신자의 무리에게 장례를 통하여 전교할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죽은 본당 신자를 생각해야 한다. 가견적(可見的)인 효과를 생각하는 나머지 무의식 중에 우리는 장례의 사목적 가치를 아직 살아있는 자들을 회개케 할려고 하고 그들을 슬픔 중에서 위로하고자 하는, 바꾸어 말하자면 생존자들을 위한 호교학적으로 바꾸어버릴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첫째가 아니라 복음전파라고 하는 단순한 구실하에 장례의 중심인물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둘째 원칙. 본격적으로 말해서 죽음은 성사가 아니다. 그러나 거기 협력하는 성사의 총체에서 그 거행은 성사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죽음의 전례라고 하는 이 성사(QUASISACRAMENTUM)의 집행자는 죽은자 자신이다. 성세의 인호에서 신자는 개처럼 죽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가능한한 의식 중에서 죽는 것이 좋다.
이번 공의회에서 도유(塗油)성사를 받는 시기를 임박한 임종시가 아니요 죽을 위험이 있는 여유 있는 시기라고 규정한 것도 여기에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죽음의 신화적인 환상을 없이하도록 모든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신자는 수동적이 아니다. 죽음의 사목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장례하는 그 순간이 아니요 죽는 그 순간이다.
우리는 공연히 한 시체 위에 이 사목을 응용할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언제나 목자의 탓은 아니나 우리가 가끔 소홀히 하는 이 요소에 주의를 환기시킬 것이다. 즉 노자(路資) 성사와 도움의 성사를 제 때에 줌과 임종을 도우는 것을 잊지 말 것이다.
셋째 원칙. 만일 한 짐승의 죽음이 무로 돌아가는 한 가지 현상이라면 신자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영혼과 육신이 갈리는 죽음이 천상진복과 「피날레」를 장식하는 부활의 생명으로 건너가는 한 가지 현상이다. 현실 속에 세말론(世末論)을 미리 맛보는 권리를 가진 전례는 죽어가는 자에게 거행하는 예절로 죽음의 신비의 이 두 가지 계속하는 시기에 의의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그것은 노자성사를 모셔주고 도유의 성사를 주고 임종을 도우는 것과 장례식을 거행하고 망자를 위한 미사를 올리는 이 두 가지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성사적 조직은 「죽음과 부활」의 신비인 성세성사부터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기억」하는 성체성사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가지 국면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여기 대하여 우리를 놀라게하는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사목생활에 있어 이 두 가지 면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죽음의 전례는 생명으로 길을 여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분리하는 것은 우리의 종교의 근본적인 조직을 불완전하게 하는 것이요 죽음을 꾸미는 월계관인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이 될 것이다.
넷째 원칙. 죽은 이를 위한 예식은 신자생활과 전례생활 속에 그 절정을 이룬다고 하는 점이다. 그것은 직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신자 안에 추수의 다발을 이루는 이전 여러가지 공로의 결실이다. 죽어가는 신자를 둘러싸고 그로부터 그 완성을 기대하기 위함같이 모든 것이 모인다. 죽음은 모든 성사의 조화를 완성한다. 죽음은 그것을 무참히 중단하는 까닭이 아니요 죽음이 뜻하는 세말적 현실 속에 그것이 길을 열면서 완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자성사 임종을 도우는 경문 죽은 이를 위한 기도 장례식 가운데 이 몇 가지 원칙을 교회가 응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기회가 있을 줄 믿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