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이뇨.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한 자니라. 이렇게 간단한 인간의 정의를 깨닫지 못하고 해매고 있는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은 것인가. 그런데 예전에 데칼트도 사람의 구성요소인 영혼과 육신의 본질을 정의해 놓은 결과에 가서는 뜻하지 않은 당착에 빠지고 말았다. 그럴 것이 정신의 본질은 사유(思惟)하는데 있고 물체의 본질은 연장(延長)인데, 그 어떻게 사유하는 영혼과 연장을 가진 육신이 결합할 수 있는 것일까? 아뭏든 결합하여 있는 것은 사실이니 그 양자가 「어디서」 결합하고 있는가를 찾아내고저, 사람의 뇌수를 해부학적으로 살펴본 것이 있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남이 하여본 일이라 우습게 보이지만 그보다 더한 우스운 일을 우리들은 나날이 예사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뭐냐하면 바로 그 육신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엄숙한 명령이다. 그런데 남도 아닌 그 육신은 다름 아닌 삼구(三仇)의 하나 즉 원수라고 문답에서 배워 익히 알고 있다. 그러니 잘 못하면 스스로 대적해야 할 원수를 스스로 즐겨 먹여 살리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실상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원수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 아닐까.
그것도 물려받은 원죄의 유산이라고 조상탓만 할수도 없는 일이다. 만약에 그것을 원조의 탓으로 돌린다면 우리들 자신이 아직도 자유 없는 몸임을 자인하는 셈이되는데 실상 우리들은 이미 원본죄의 씻음을 받은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은 참말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무릇 사람됨의 자랑이 자유를 가졌다는 점인데 우리들이 갖고 있는 자유는 그저 주어진 자유가 아니고 은혜롭게도 받은 자유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라고 할 것인데, 뜻밖에도 그 귀한 자유를 죄다 도로 바치는 영혼들이 있다. 그것도 아담이 범명(犯命)하여 자유를 남용한 댓가를 억지로 치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사에 의하여 자기의 자유를 자진 봉헌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갸륵한 영혼들을 「말씀의 정배」라고 한다. 이 세상에 육신을 타고난 이상 아주 떼여 놓을 수도 없는 육신을 둘도 아닌 동반자로 함께 살면서도 말씀의 정배들은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자기의 육신을 저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몸은 마음의 무덤』이라고 생각한 옛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지상세계 즉 유형한 물질계는 정신의 도덕적 정화(淨化)의 장소밖에 안 될 것이다. 실상 말씀의 정배들도 이 지상생애(生涯)에서 벌써 연옥을 다 치르고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또 한 편에서는 길은 이 지상생에 중에 이미 지옥을 다 마련하고 가는 것이 아닐까.
성 토마스에 의하면 지옥과 연옥의 차이는 시간의 차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전자는 무시간(無時間 즉 永永)이요. 후자는 기한부라는 뜻이다.
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에만 시간이 있는줄 알았더니… 그 「시간」의 정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세상이 하도 괴로워서 하루바삐 어서 어서 빨리 시간이 가서 나도 가버리면 좋겠다는 심정의 하소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도대체 그래가지고서 가기는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무리 우리들이 서둘러도 시간은 시간이지 우리 맘대로 가지고 가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마도 우리들이 가는 것이지 시간이 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우리들이 맞이하는 것이지 시간이 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당에 갔다 온다. 그리고는 밥을 먹고 일터에 갔다 돌아온다. 그리고 자고 일어나서 또 성당에 갔다 온다. 내 집이 본거(本據)이니까 그럴 수밖에. 그런데 내 자신의 본거는 내 집 뿐일까? 우리들의 영혼은 천주께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신앙의 첫 걸음이다. 그런데 천주는 저 천당에만 아니 성당 안에만 계시는 것인가. 아니로다. 내 집에도 물론 계시다. 천주 무량(無量)하신 까닭이다. 아, 언제나 주시는 성총은 무한하되 그것을 받는 우리들은 유한하도다.
金奎榮(東大 哲學科 主任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