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학생 「데모」때 악질자본을 규탄했었다. 그리고 그당시 당국발표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어떤 학생들은 다수의 일본서 들어온 공산주의 서적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앞에 일과 뒷사실을 연결시켜 보자는 것은 아니다. 또한 거기 대한 논의를 일으켜 볼 생각도 없다.
그 전후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집어서 말할만한 개재가 못된다. 이번 사태의 발생적 원인이 1차적으로는 정부였다고 했으니(公式言明) 그것과는 어떤 관련성이 있겠는가. 가령 삼분폭리(三粉暴利)같은 일시나마 국민생활을 위협했던 명백한 반사회적(反社會的) 행위에 대해서도 현행법규의 미비(未備)만을 쳐들고 있으니, 비상계엄이라는 강력질서까지 펴놓은 정부언명으로서는 아직도 너무나 미봉적이요 모호한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그간 포고령이 계속나왔지만 진정, 사태수습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직 없었다. 물론 조속한 비상계엄의 해제를 전제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납득이 더가는 바도 있지만, 여야협조라는 극히 상식적인 정치적 동향을 보여줄 뿐 앞서 지적한 정도의 문제의 핵심이나 지실한 사태수습의 언저리에도 못들어서고 있다.
우선 학생들이 규탄한 「악질자본」의 소재(所在)를 밝혀야 한다. 첫째 그것은 우리와 같은 극단적 비정상의 시장물가에 편승한 간상모리배, 그중에서도 그 우두머리격이 되는 지독한 악덕상인 등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의 악질자본의 뜻은 경제학적 해석에만 맡길 수 없다는데 우리의 깊은 관심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현대 비판서적을 뒤져보면 맑스의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을 비롯하여 소위 실천적 목표(革命) 등을 어느정도는 비판한 것 같지만 그 불철저한데 놀랄 때가 많다. 거듭 분명히 해두거니와 이같은 사상문제와 어느 특정의 현상을 관련시켜 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사태수습이라는 지상(至上)과업을 생각는 때이니 만큼 「데모」학생들의 한가지 구호를 두고서도 그것을 깊이 파헤쳐볼 정성이 아쉬운 것이다. 이렇게 현실이 어지러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원리원칙으로 돌아갈 냉정한 태도가 필요하며 더군다나 학생들의 자세로서는 더욱 필요한 일인줄 안다.
(2)
교회는 사회정의(社會正義)에 대해 어떤 원칙을 가르치고 있는가?
『사회 및 경제적 진전(進展)으로 계속 증대된 부(富)는 레오 13세의 언명대로 (이것이) 모든 이의 필요에 결과로 만족이 가도록, 각 개인과 사회각계층간에 분배되어야 한다.』(비오 11세 社會再建秩序) 『만일 옳은 분배가 실현되지 않고 혹은 불완전하다면, 국민경제의 본 목적은 달성 될 수 없다.』 (비오 12세 1941년 ▲사백주일)
『생산재까지를 포함한 사유재산권의 자연적인 특성만을 주장함으로써 만족한 것은 아니며 또한 전사회계측안에 효과적인 분배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요안 23세의 「마뗄 엩 마지스뜨라」 CCK 刊行 47頁) 동 회칙은 이 문제를 이같이 맺었다. 『성경에서 사유재사권은 합법적으로 인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그러나 오 주께서는 부자들에게 호소해서 그들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넘겨줌으로써 정신적 재물로 변경시킬 것을 꾸준히 권고하셨으며… 천주성부의 영원한 보고속에서 더욱 불어갈 것이다.』라고.
(3)
우리는 현재 비상질서하에 있고 정치적으로는 여야의 협조로 그야말로 거국일치의 사태수습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사태수습이란 여야협조나 비상질서로 수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이 단시일에 성취될 것을 바라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앞에 사회회칙을 든 것은 이제야말로 절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교회의 사회교의(社會敎義)를 들어 볼 때가 온 것이다. 작년여름만 해도 서강대학서 아시아 경제 · 사회생활 「세미나」가 있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우리현실에는 맞지 않는다는 소리를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실상 우리 현실에 맞지 않았었다. 그때문에 오늘의 사태를 빚어낸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우리 현실에 그 일단이라도 실현될 때 우리는 밝은 앞날을 바라볼 수 있겠다. 우리는 반공(反共)을 표방하고 있지만 따라서 그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교회의 사회교의를 거울삼아 현실을 검토 · 분석할 절박한 때에 이르렀다. 그 방면의 지성을 동원할 때가 온 것이다. 대안(對岸)의 불구경을 할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