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회관(社會觀)이 오늘과 같이 더욱 밖으로 천명되어야 할 때는 없다. 흔히 숫적인 열세(劣勢)를 구실삼아보기도 했었지만, 만일 지금의 신자 증가를 지속시켜 간다면 100만 교세가 멀지않다. 이같이 숫적인 의미에서만도 우리의 사회관을 밖으로, 더욱 직접적으로는 정치, 사회, 문화 및 교육 등에 반영시켜갈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권리주장 내지 그 태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적극적인 행동은 무엇이겠는가?
그게 바로 가톨릭의 사회참여(社會參與)란 것이다. 혹은 현실참여(現實參與)라고 한다.
이 사회 및 현실에의 행동적이요 실천적인 참여야말로 모든 가톨릭자에게 부과된 보냄을 받은자의 사도직 그것이 되는 것이다. 사제(司祭)는 미사중에 그에게 맡겨진 권한으로 미사의 중심이 되는 변화지례(變化之禮)를 집행할 수 있다. 이를 그대로 본받아 오늘의 평신도들은 자기들이 처해있는 환경을, 직접 제이웃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아마 평신도사도직 운동의 으뜸가는 목표로 간주되는 것이다.
실천적인 사회참여 그것이 보다 큰 성과를 걷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거기 마련될 준비를 일일이 열거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우선 사회교의(社會敎義)를 들 수 있다.
우리의 자랑인 근세 교황들의 사회회칙(社會回勅)을 공부해가야 한다. 그 안에 모든 원칙이 담겨져 잇고 현실을 분석, 검토할 수 있는 설명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시사(時事)문제를 논할 때, 사회회칙을 인용할량이면, 가끔 일반지성층의 충분한 공감을 받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지난주간에 『私金融團束法案』이 각의(閣議)를 통과했다. 동법령의 내용을 대하지는 못햇으나 그것은 사금융업 등을 합법화한 것이다. 은행대부가 억제되고 있기 때문에 서민경제를 돕는 사금융을 활용하자는 것이겠는데, 은행이식의 10배를 넘는 고리대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현실성이 어디있건 그 자체의 모순성만은 달리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대해 사회교의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설령, 그같이 필요악(必要惡)의 낙착이 가더라도 정의(正義)의 소리가 쉬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필경 그러한 모순의 간격을 줄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참여라는 보다 효과적인 행동을 일으키는데 거기 선행(先行)할 일과 부단히 자극을 주는 것이 곧 사회회칙 연구이라고 전제했었다.
사회회칙의 연구는 먼저 충실한 원리원칙의 공부인 것을 짐작해 둘 일이다. 지난주 레오 13세 해설은 많은 감명을 주었다. (講師 蔣柄補 神父) 강사는 루소의 자연사상 및 그의 「사회계약」설을 비판해갔다. 만일 청중이 일반지성인(非가톨릭)이었다면 소위 요즘 유행하는 자연주의(自然主義)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논리형식인 「權力에의 意志」설을 들고 나와서 질의와 논란을 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뭏든 원리원칙에로 돌아갈 필요성이 이 땅에서와 같이 요청되는 곳은 없다. 「法에 依한 統治」를 내세우고 혹은 「法秩序」를 역설한대야, 국민이 충심으로 호응해오지 않고서는 어쩔 수 없다. 이것 또한 중요한 국민적 역량인 것이다. 「法秩序」 안에 자유로이 생활할 줄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잘 안된다는 것이 기왕 알려진 바에야 그 입문단계로 볼 수 있는 정신적 자세(姿勢)에 많은 계몽을 해갈 일이 아닐까.
그 정신적 자세를 바로잡아 주는 것은, 권위있는 원리원칙밖에 없다. 법질서를 안지켜주는 국민 앞에는 보다 강력한 법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수단이요 근시안적인 술법이다. 실상 그렇게 말하는 법질서란 법철학적인 내용이 매우 빈곤한 수가 많다.
이에 우리는 법질서에 선행할 우리 국민의 정신적 자세가 윤리적 기초위에 설 것을 강조하고 그 표준을 근세 교황들의 사회회칙 및 교회의 사회교의중에서 찾아가려 하고 있다.
얼마전 한국 가톨릭 사회문제 연구기관을 만들어 보자는 소리가 높았다. 만일 이런 종류의 기관이 서있어서 연구와 계몽을 겸행해 간다면 우리의 사회 참여에 큰 힘이 될 수 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촌전의 빛을 가리울만큼 착잡하다. 고독한 사람은 현실에 참여해보지도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현실에 뛰어 들어가보라, 그때는 정녕 고독할 것이라고 한 말은 우리의 현실참여에 주는 경구(警句)같이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