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2월11일과 12일 양일간 「빠리」에서는 「빠리」 외방전교회 대신학교 설립(1663) 3백주년을 겸한 「빠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창립 제3백주년의 성대한 기념 제전(祭典)을 베풀게 되었다고 한다. _레르(河) 동 회 한국지부장은 동 식 전에 참석하기 위해 이미 수일 전에 향발했으며 마침 공회의에 참석 중인 대전 원 주교께서는 현지에서 바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 그 임시해서 형편이 닿는 다수의 우리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한국 및 이 땅의 가톨릭을 대표하는 명목으로 어엿이 참석하게 될 것을 믿어 마지 않는다.
3백여 년 전 「빠리」에서 발족한 동 회원들의 첫 발은 카나다로 옮겼었지만(1659년) 그러나 그와 동 시각에 주로 극동방면으로 진출하여 확고하고 견실한 방법을 써 교구설정과 신학교 사업을 일으켜 갔었다. 그 때문에 극동지역 가톨릭은 「빠리」 외방전교회에 힘입지 않은데가 별로 없고 그 회원들의 고귀한 순교의 피를 치루지 않은 곳이 드물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는 아마 그 3백년사를 누비는 가장 극적인 대목에 들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이렇게 「빠리」 외방전교회 3백년간의 역사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한국 가톨릭으로서는 특히 오늘의 융성한 교회 발전의 현재에서 생각해 볼 때 이번 「빠리」에서 거행되는 동 식_이야말로 곧 우리 자신의 긴 역사의 한 토막을 기념하는거와 거의 같은 뜻깊은 감회를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주변에서 3백주년을 맞이하는 단순한 역사적인 사건 등은 흔하겠지만, 어떤 사업이 열면 3백년을 일관해 내려온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금년은 적십자사 창설 백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사업은 어디까지나 각국의 국가적인 뒷받침이 있고 하나의 공동선(共同善)을 채워가는데 불과한 것이 있다. 구라파에 3백년을 경과한 대학이 적지 안다. 그것 역시 학문의 전당으로 그야말로 무풍지대에 자라난 온상(溫床)의 재배식물과 다를 바 없다. 「빠리」 외방전교회의 그것은 극동에 있어서는 거의 근세(近世)의 시작이 되는 때를 당하여 갖은 시련을 하나도 떼놓지 않고 다 겪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기할만한 것은 먼저 그 고장에서의 종교박해엿었다. 박해에는 그 고장 독자적인 이유가 있었겠짐나 한국에서는 국법으로서 완전히 그 선교활동을 불법화했기 때문에 그 양상(樣相)은 실로 처절의 극을 다한 것이었다. 그간에 있어서 이들 프랑스 선교사들이 당해낸 순교를 겸한 역사를 일일이 열거하는 본란의 여유를 가지지는 못하거니와 그것은 한 말로 완전한 의미(意味)의 교회사를 축소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의 선교활동과 그 당시의 국내 정치사정과는 경시할 수 없는 관련이 있었다. 이 또한 방대한 고증을 다는 번잡한 설명이 앞서야 할 일이다. 예속(禮俗) 문제만 하더라도 그와 같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들의 극동 진출은 폴튜갈, 영국, 그리고 화란같은 강대국이 서로 다투어서 극동으로 넘나들고 있던 때를 같이 했었으니 복음을 전파하는 전교회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고충이 끊어지지 않았었다. 그 뿐이랴. 프랑스 안에서 일어난 소위 「얀세니우스」 사상은 동 회 본부 안에 침식해 들었고 프랑스 대혁명은 마침 「빠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 보충의 유일한 원천이던 욉아 전교회의 대신학교를 일시나마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이와같이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역사적인 성난 물결과 부닥쳐 가면서 오직 일선에 나선 선교사의 깊은 신앙으로 통하는 사도적 열망과 프랑스 국민들의 희생적인 지원을 얻어 1910년대의 준_한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의 통계를 보면, 주교 49명, 선교사 1,025명, 본방인 사제 1,444명 그리고 대소신학교 65교(신학생 3,723명)에 도달했었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업적은 본방인 사제 양성에 주력했던 일이다. 「빠리」 외방전교회가 저 「페낭」(島)에다가 우수한 대신학교를 설립한 것은 1807년에 된 일이다. 이곳에는 20여 명의 우리 유학생이 입학한 일도 있고 우리 근세사에도 빼지 못할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밖에 프랑스 선교사들의 손으로 된 우리의 최초의 한불자전(韓佛字典) 등을 위시한 문화전달의 공헌만도 우리로서는 국민적인 감사의 정성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번 「빠리」 외방전교회의 3백주년 기념식전에 즈음하여 이를 마치 자신의 기념과 전혀 같은 뜻으로 맞이하고 싶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직접, 간접의 공고한 유대를 맺어가야 할 보다 먼 장래에 이르도록, 이록, 찬연한 역사적 금자탑(金字塔)을 다같이 장하게 바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