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너희게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리스도의 애덕이다. 삼십삼년이란 현세생활에서 실천하고 가르치신 행동과 교훈 속에 함축돼 있던 근본 사상은 남을 사랑하라는 것이었고 제게 가까운 자를 자기와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왜 새로운 계명이라고 했을까?
첫째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인간인 우리를 사랑할 때 완전한 희생이 되어 제물로 바쳤다는 점이고,
둘째로 하나의 감정 또는 기분으로서가 아니라 명령적인 계명임을 알고 이지적으로 사랑하였다는 점이다. 그 예로써 자기의 수고수난하심을 제자들에게 암시하고 미리 말씀하시자 베드루는 놀라 당치않는 일이라고 만류했을 때 그리스도는 성부의 뜻을 행동규범으로 삼는 그에게 베드루는 「사탄」으로 보였고 물러가라고 꾸짖었다. 만일 그가 범인(凡人)이었더라면 위로의 말로 들렸을 것이고 고맙게 받아 들였을 것이다.
십자가상에 매어달렸을 때 군중들이 함성을 올리며 기적으로 자기의 신성을 나타내면 자기를 믿겠다고 외쳤을 때 인간적으로 그 이상의 유감이 그리스도에게는 없었을 것이다.
능히 십자가상에서 내려와 기적을 행하고 군중을 탄복시킬 수 있었지만 그것이 성부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이들한테서 욕설을 당하고 조롱을 받으면서 그들을 사랑하였다. 사랑이 크고 진정하면 그럴수록 손해를 보는 길이다. 인간적으로 이것이 세속에서 어리석은 길이다.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일부분이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남에게 전해지는 것이고 그만큼 내가 불편을 느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애덕은 어디까지나 이지적이요, 명령적이며 계명적이며 희생을 각오하는 덕행임을 알 수 있고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애정이나 기분의 경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복음서의 구절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이 사랑으로 차 있다. 또 그 대상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죄악으로 덮여있고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인간들이었다. 이들이 그의 친구였다. 또 그렇게 죄인들과 사귐으로써 욕설을 들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할 때 대게 무슨 유익한 점을 바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르쳤다. 자신을 전연 잊어버리고 남의 진정한 유익을 위해서 사랑하는 길이다. 이것을 명백히 증명해 주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세속에서 역설적인 애덕실천에 대한 그의 선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명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대게 가까운 자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에게 가까운 자는 누구일까? 내 옆에 근접하는 모든 이들을 말한다. 집에서 학교에서 다방에서 일터에서 나와 접촉하는 분들을 말한다.
한국 가톨릭신자에게 한국인이 누구보다 가까운 자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실천하는 것이라면 현재 어느정도 이 길을 실천하고 있는가? 길에서 죄인이나 혹은 사회에서 버림을 받은 사람을 만날 때와 권세가 있고 돈이 있고 지위가 높은 이들을 만날 때 내 관심이 내 애정이 어느쪽으로 더 많이 쏠리는가. 만일 후자에게로 쏠린다면 그것은 내가 무슨 유익이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요즘 비가톨릭자들이 이웃돕기운동을 많이 전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가난한 수재돕기, 극빈자돕기, 수재민돕기, 가난한학우돕기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런 운동은 운동 자체를 고찰해 볼 때 남을 돕는 동기가 순수하다.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무엇을 바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냥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도와주자는 것 뿐이다. 이 점 이들은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의 애덕을 옳게 실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우리가 이런 사랑의 사업에 얼마나 솔선수범이 되는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우리의 애정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저명인사 부자 권력가일 때 마음 흐뭇하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의 친구가 죄인과 버림받은 이들이라면 그의 제자인 우리는 선인과 명성이 높은 이들만 친구로 삼아야 되겠는가. 『제자는 그 스승보다 낫지 못하니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