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는, 성당도 없는 시골에서 살았다.
내가 살던 「석벽이」란 동네는 연안읍(延安邑)에서 서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바닷가의 한촌이었다. 20여 채의 집이 있었을뿐인 조그마한 동네지만 송봉면(松逢面)뿐 아니라 연백땅(郡) 중에서도 색다른 마을이었다.
소지주였던 부친은 면내 유지에 속했는가 싶다. 하지만 교우라고는 우리집 이외에 한 사람도 면 내에는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상한 달력을 벽에 붙여놓고 있는 집(첨례표) 그리고 애들 이름이 모두 이상한 집(외인들도 우리집 형제들의 세속 이름은 모르고 내 누님보고는 「방울레야」하고 바울라란 본명을 불렀고 나보고도 도마스로만 불렀으니까) 우편배달부가 오면 으례히 우리집에 오면 한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여러가지 잡지(경향잡지·가톨릭청년·가톨릭소년 및 가톨릭조선 등)를 놓고가는 집.
주일날만 되면 모두 꿇어앉고 첨례를 본다는 집(외인들이 방문 왔다간 『지금 첨례보고 있군』하고 첨례란 말을 썼다) 예수 믿는 집이라는데도 예배당 예수와는 다른 천주를 믿는 집으로 알려진 집이었다.
이와같은 마을에서 사는 동안 크리스마스라고 무슨 특별한 행사가 있을 수는 없었다. 30리 떨어진 연안읍에도 그 당시는 해주(海州)본당에 예속된 공소가 있을 뿐이었다.
일곱살 여덟살 때의 일이라 추억하기에는 너무나 흐려진 부분이 많지만 예수성탄날 초저녁부터 잠이들면 자정에는 으례히 깨워 첨례를 보곤 하였다. 졸리어 죽겠는데 적어도 30분간은 졸고있다고 꾸중을 들어가며 「크리스마스·이브」를 지내기도 했다.
이래서 밤에 잠을 깨워 『예수 아기가 이 추운 밤 중에 나셨단다』란 소릴 듣는 날이기만 했다. 물론 「크리스마스·이브」란 낱말도 몰랐고 「싼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굴뚝으로 선물을 갖고 온다는 이야기도 모르고 지냈다.
아홉살쯤 되었을 때였나 보다. 이웃 마을에 충남 서산에서 이사온 옹기항아리 장수네가 교우집이라서 성탄날 밤 우리집에 모여 같이 첨례를 보고 같이 더운 밥 해먹은 것이 성탄날의 처음 행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는 내가 열살 때 서울로 수녀누님(지금 拉北)과 함께 상경하여 성가 기숙사에 들면서부터 등불행렬에도 참가하고 성당학교인 계셩보통학교에서 성가도 배우고 기숙사에선 선배들의 가장행렬 연극 등을 보기도 함녀서 호화롭고 장엄한 자정미사에 영해 예수를 맞이하는데 어린 마음을 부풀게도 하였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것은 시골 한촌에서 소박하게 첨례보며 지내던 그 시절 같기만 하다.
신태민 선생님(전 경향신문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