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여 저 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이 되게 하소서 성부 내게 계시고 내가 성부께 있음 같이 저들이 또한 우리안에 하나이 되어 세상으로 하여금 너 나를 보내신줄을 믿게하소서』(요왕 17장 21절)
이는 그리스도 수난 전날밤에 그를 믿고 따라는 모든 성도들의 일치를 위하여 천주성부께 드린 간절한 기도의 말씀이다.
오늘 「에꾸메니즘」으로 알려진 그리스도교 재일치운동은 다름아닌 바로 이 그리스도의 기도에 대한 그리스도교 세계의 각성이다. 그러기에 「에꾸메니즘」은 현시대 요청에 영합(迎合)한 정신운동만이 아니다. 더구나 이것은 -비록 평화에 이비자함이 보다 크다 할지라도- 동서 양진영의 평화공존과 흡사한 기독교 각 교파간의 평화공존을 꾀하자는 것이 아니다.
「에꾸메니즘」은 신앙운동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교회본질에서부터 출발된 것이다.
그리스도 교인이면 한사람의 제외없이 이 운동에 적극 참여토록 불림을 받았으며 그것은 그의 그리스도교적 양심에 부과된 책이면서 그의 그리스도자로서 이것을 떠나서는 교회도 신자도 세상이 믿겠금 참되이 그리스도를 시현할 수는 없다.
「에꾸메니즘」에는 필연적으로 각 교회간의 「대화」가 따른다. 「대화」없는 「에꾸메니즘」은 상상할 수도 없다. 오늘 세계 도처에서 그리스도교 각교회간에 교회재일치를 위한 「대화」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음은 이와같은 이유에서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성공회의 발기로 인한 모임을 비롯하여 각 교회간의 「대화」 접촉은 점차로 움터가고 있다.
이와같이 조성되어 가고있는 「대화」분위기를 더욱 살려보기 위해 본지(本紙)는 금반 한국 「프로테스탄」 교회 지도자 되는 분들을 지상(紙上) 초대하였다. 여기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초청된 모든 분들이 즐거이 응해주신데 충심으로 사의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분들의 그리스도자로서의 진지성에 느낀 감동이 컸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일치」는 물론 선의(善意)만으로써나 「대화」로써 얻게될 「상호이해」만으로써 쉽게 이루어질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일치는 재언할 필요없이 정치협상처럼 「이해관계 조절」 또는 「타협」으로 성취될 것이 아니다. 일치로 향해가는 길은 아직도 멀고도 평탄치 못할 것이다.
교리적인 또는 역사적 전통이 빚어낸 심연이 -우리가 다 한결같이 같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음에도 불구코-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다. 우리의 「대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심연 앞에 눈을 감는 것보다 오히려 먼저 이것을 승인할 만큼 솔직해 지는 것이다. 저명한 「프로테스탄」 신학자 오스깔 꿀만이 지적 한바와 같이 우리는 보다 더 솔직히 허물없이 서로의 「상이점」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우리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서 재발견 하는 것이다. 교회일치는 물론 「신앙의 일치」는 있을 수 없다. 허식(虛飾)으로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보다 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우리는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말을 「프로테스탄」 형제들에게 향해서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안에 향해 강조하고 싶다.
단적으로 말해서 「프로테스탄」교회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신앙의 정통에서 이탈한 열교」라는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때 그런 정신태도 만으로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에 임할 수는 없다. 그들이 우리와 갈려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우리의 형제」이다. 성 아오스딩의 말씀대로 천주경=주기도문을 드리는 한 즉 천주를 아버지로 모시는 한 그들과 우리의 형제관계는 존속되고 있다. 본지(本紙)가 이번에 「프로테스탄」 형제들을 지상초대 하는데 있어 대내적(對內的)으로 가진 뜻이 바로 이것이다.
교회는 어느세대에 있어서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충실히 따른다. 「내일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어떻게 시현할 것인가? 그것은 전인류를 묶는 가족적 형제애(兄弟愛)로써다. 우리는 여기 다시 누구보다도 더 큰 형제애에 산 요안 23세 교황이 그의 임종의 지극한 고통을 바쳐가며 드린 기도를 상기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그 수난 전날 밤에 성부께 애원하며 바친 기도의 말씀 『모두가 하나이 되게 하소서』였다. 오늘 또한 「프로테스탄」을 위시한 다른 교회들과 교회일치를 위해 가장 형제적이요 「대화」적인 이 대리자 교황 자신 바오로 6세이다.
교회의 「내적쇄신」과 「일치」는 제2차 「바티깐」공의회의 두 큰 「모티브」이다. 이것은 하나이신 아버지 천주님 안에 전인류를 그리스도를 통한 형제적 사랑으로 포옹하여 모으는 교회 본래의 사명이다. 가톨릭은 무엇이냐? 가톨릭은 그 가슴에 전우주를 사랑으로 안고 생명으로 다시 낳는 것이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갈 길이 따로 있지 않다. 『저 모든 이로 하려금 하나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