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與野)라는 말은 원래 정부가 가진 당성(黨性)을 기준으로 하여 불리우는 정치인들의 집단명칭에 불과하다. 정치의 이념과 정치인의 사명이 백성을 보다 행복하게 한다는데 있는 이상 야(野)의 나라가 따로 있고 야의 백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 어떤 정책을 세우고 어느것을 먼저하며 어느것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가 있고 특히 야당은 흔히 있기쉬운 정부의 건망증(健忘症)과 자기도취(自己陶醉)를 일깨워 주는 후견적(後見的) 공동책임을 지고 보다 효율적(效率的)인 정치에 협력하여야 하는 중한 사명을 띠고있다. 여야간의 당리 · 당책의 대립은 정치인끼리의 일이며 백성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언제나 공동책임을 면치 못한다.
6·3 비상사태이래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의 정치적 양식(良識)과 꾸준한 노력으로 전개된 여야협상은 그동안 갖은 난관을 극복하고 드디어, 지난달 28일에는 해엄(解嚴)공동결의안을 국회본회의에 내놓게 되었고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여야협상의 의의와 그 과제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별것이 아니라고도 볼 수 있으나 작금의 그릇된 정치분위기의 방향을 바로잡는데 있어서 중대한 의의를 가진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침체(沈滯)된 정치 분위기의 과감한 전환이 요청되는 현 단계에 있어서 기성 정치인들의 일대 각성이 요망되는 동시에 양식있는 정치인의 협동과 슬기로운 새 정치인의 대량출현(大量出現)이 갈망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원래 정당정치는 그 대립에서 어떤 정치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제도이므로 대립이 생기는 것은 극히 정상적이다. 다만 그 해결이 백성의 진정한 복리(福利)를 위하는 정치인의 양식을 통하여 공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정치는 결코 힘의 파생이 아니다. 철인(哲人) 정치나 성현(聖賢) 정치가 아니라도 적어도 민주정치에 있어서 백성을 위하는 공동노력과 공동책임에서 벗어나는 정치인은 여야를 막론하고 용납될 수 없다. 따라서 전쟁이 사회의 혼란을 가져왔을 때에는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백성에 대한 공동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모르거나 그 책임을 회피(回避)하는 자는 이미 민주정치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고 할 것이다.
질서는 사회의 기둥이다. 이는 질서가 곧 정의와 선(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질서의 혼란은 적(敵)에 포위된 성벽(城壁)이 무너지는 것에 비할 수 있다.
그 성벽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적과 다를 것이 없다. 한편 사회질서는 언제나 그 사회의 선(善)과 정의를 보장할 수 있게 튼튼하고 안정된 것이라야 한다. 힘있으면 법을 만들 수 있고 강행(强行)할 수 있으면 법이라고 생각하나면 강도단(强盜團)의 규칙도 또한 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조령모개(朝令暮改)하는 법령과 행정은 새질서의 건설이라기 보다 질서의 파괴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전통사상 속에는 두가지 극단의 오류(誤謬)가 있다. 즉 권위(權威)주의 사상은 법을 권위자의 자의적(恣意的) 명령으로 푸는가 하면 덕치(德治)주의사상은 법보다 치자(治者)의 인격에서 정치질서를 찾는다. 그러나 법은 힘으로 창조되는 것도 아니고 치자의 인격에 따라 다른 것도 아닌다. 입법(立法)은 정의의 질서를 발견하여 구체적으로 정립(定立)하는 것이고 사법 · 행정은 그 법을 또한 구체적으로 적용 행사하는 것이다. 악법과 악정의 시비(是非)도 이런 기준에서 운의(云議)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다급히 해결되어야 할 여러가지 과제가 쌓여있다.
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문제 등 산적(山積)된 난문제들의 처리에는 모든 정치인의 이지(理知)와 성의를 모은 헌신적 노력이 요청된다. 언론규제니 학원보호법이니 하는 따위 보다 권력구조니 개헌이니 하는 것보다 몇갑절 조급하고 효과적인 협상과제가 수없이 있다. 더구나 간신히 조성된 여야협상 「무드」를 육성하는데 온 국민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때에 이해될 수 없는 일들이 또 벌어지는 것만 같다. 양식있는 정치인들은 하루빨리 협동하여 여야협상의 새로운 지표(指標)를 세워야 한다.
굶주리는 백성을 구해야 하고 앙등하는 물가를 내려야 하고 산업을 개발하여야 하고 국가재원을 개척하여야 하고 유휴노동력을 활용케 하여야 하고 퇴폐하는 국민정신을 바로잡아야 하고 횡행하는 범죄를 단속 · 방지하여야 하고 신뢰와 협동의 인간관계를 조성해야 하는 등 일일이 매거(枚擧) 할 수 없다.
인간을 파괴하는 사회 속에서는 인간이 완성될 수 없다.
사회개조에 발벗고 나선 정치인과 모든 지도자들의 공동의 이념과 공동의 노력만이 그 성패(成敗)를 좌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