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떤 도서관에서 「종교무관심론」이란 책을 언뜻 본 적이 있다. 그 때 그것을 읽고싶은 충동을 받았지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비단 종교 무관심뿐 아니라 오늘날 사회가 복잡해지는 한편에 이것과 정비례로 또 다른 편에서도 무관심증이 격심해지는듯하다. 음악가는 자기 분야와는 거리 먼 천문학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 있고 지하실험실에서 일생을 보내는 과학자들에게는 그들의 분야가 아닌 올림픽 금메달이 하나의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허구 많은 무관심증 중에도 종교무관심은 더욱 무섭게 작용하는듯하다. 무종교인에게 종교 얘기를 하면 『글쎄 종교가 나쁜 것은 아닌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열이면 열 예외 없이 종교무관심증에 걸린 사람들이다. 오늘의 전교는 무엇보다 「종교무관심증」을 치료해주는 주사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수덕신학상으로 보아 사랑의 반대어를 「미움」이라 하지 않고 「무관심」이라고 한다. 무관심은 사랑의 반대다. 미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증거이며 관심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그것을 뗄 수 없는 어떤 미련이 있다는 것이겠고 미련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사랑의 한오라기가 붙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자니 「미움」이란 사랑이 변질된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한 주일은 세계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이었다. 우리는 여기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던가? 우리 교우들은 바로 우리 집안일인 공의회에 대해서도 그렇고 공의회가 가르치는 「교회일치」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아예 관심이 없다. 앞산에 불구경하듯 하고 있으니 이 무서운 무관심증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 것인가 큰 문제다.
▲무관심이 사랑의 결핍이라면 우리는 그만큼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바깥 외교인들이 공의회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일치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도리어 무관심증에 걸려있다. 무관심증을 치료할 의원이 아쉽다. 무관심증을 예방하는 약이 아쉽다. 언제나 무관심증 환자가 우리 주위에서 가시어 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