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띠아니즘」의 요소적인 사건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했다. 영혼의 부활뿐 아니라 육신의 부활도 약속했다. 천주는 이 약속을 세상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이미 마리아에게 이행했다. 구세주를 낳은 정결한 어머님의 육신이 무덤 속에 썩어버릴 수 있었을까. 마리아는 영육으로 하늘의 영광 속에 올라갔다. 그는 우리의 장래를 예시한다.
5세기 당시 일반신자는 마리아를 천주의 어머님으로 존경했다. 네스또리우스 총대주교는 마리아를 그렇게 부를 수 없다고 했다. 「에페소」 공의회는 그를 파면하고 마리아를 천주의 어머니라 부르도록 인정했다.
「에페소」 시민은 기쁨에 넘쳐 그날밤 횃불 행렬을 했다.
「니체노」와 그 다음 공의회에서 교회의 일치가 빛났다.
그러나 1세기가 지나가기도 전에 그리스도교의 어떤 나라는 전체로서 모교회에서 떠나갔다. 교회역사의 슬픈 「페이지」이다. 16세기 소위 개혁교회가 어머님의 품을 버리고 교회에서 떠나갔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베드루의 집에서 떠나간 모든 사람들의 귀향(歸鄕)의 길을 여는 것을 그 한가지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소위 교회의 제1차 공의회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는 예수의 어머님과 함께 소집되었다. 이번 공의회에서도 예수와 성신 다음에 위치하는 위대한 「멤버」는 성모시다.
과연 마리아는 일치 운동에 방해되는 존재일까? 교회는 지금 일치를 위한 끈덕진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대화는 흉금을 털어놓지 않고 겸손이 없이는 이룩되지 아니한다.
여기 마리아와 「에꾸메니즘」에 관해 무엇보다도 먼저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서로 형제로서의 양심을 다시 찾는 것이다.
갈려진 형제들에게 이 양심을 깨우쳐 줄 수 있는 이는 어머니가 아닐까. 그러나 형제들 사이에 어머니를 어머니로 승인하고 섬기는 편과 그렇지 않는 편이 대립되어 있는 형제들은 영영 서로 다시 형제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서로 형제적 양심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를 먼저 발견해야 할 것이다. 마리아와 「에꾸메니즘」에 있어 다음 요건은 우리서로가 공동의 전통을 다시 찾는데 있다.
오늘 프로테스탄 형제들은 성모를 공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종교개혁이 있은 당시의 「프로테스탄티즘」이었던가? 종교개혁의 제일의 대표적 인물인 말띤 루터가 성모께 깊은 신심을 가졌던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의 「막니피갈」(성모찬천주가) 번역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와같은 루터의 성모공경에 우리는 확실히 같은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
가톨릭에는 분명 성모신심에 과장이 있음을 승인한다.
그러나 오늘의 「프로테스탄티즘」이 「성서만이」 「신앙만이」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준다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모친 성모를 일체의 존경대상에서 배척하고 있음 역시 다른 극단이 아닐까? 그리스도 우리의 형제일 때 그의 어머니가 우리의 어머니 됨은 너무나 당연하다.
누구보다도 인간으로서 윤리 도덕적으로도 가장 완전하였을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어머니에게 대한 효성에는 우리보다도 못하였다 할 수 있을까? 성부께 성자로서 효성을 다함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성모께 역시 효성을 다하신 분이다. 성모는 결코 교회일치에 장애되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형제로 다시 맺게 해주는 어머니시다.
다행히도 오늘 프로테스탄 신학자들 사이에 성모께 대한 이해가 깊어져간다고 듣고있다.
이와같은 성모께 대하 이해가 새로이 「프로테스탄티즘」 안에서도 깊어져 감은 교회일치를 위한 고무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 은총이다. 그러나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어느 민족문화도 그것이 자연윤리와 정반대되는 것이 아닌 한 그 문화와 그 전통 안에 오히려 쉽게 토착화(土着化)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볼 때 부모께 대한 「효」를 인간완성의 근본으로 가르치는 동양의 리도덕은 가장 그리스도교의 그것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성모공경은 위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결국 「어머니」께 대한 효성 이상의 다른 무엇도 아닐때 성모공경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교인을 일치로 이끄는데 있어 누구보다도 이바지 할 수 있는 이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동양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