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은 개별주의를 지양하고 여러 무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그래서 敎區에는 參事會議가 있고 국가별로는 전국주교회의가 있고 급기야는 全世界의 公議會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그렇겠지만 특히 한국 가톨릭의 與件으로보아 이번 主敎會議에서 다루어야 할 긴급한 문제의 하나로서는 個別敎區를 떠나서 全 한국 가톨릭의 유기적인 活動을 위한 超敎區的인 기구 조직의 문제라고 사려되는 바이다.
結論부터 말하자면 한국 가톨릭의 모든 교회기구 조직을 통할하고 한국 가톨릭을 대변할 수 있는 「한국가톨릭中央協議會」가 있어야겠다는 理論이다. 독자들 중에는 현하 천주교중앙협의회(CCK)가 있지 않느냐고 도리어 의아할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종류의 中央協議會가 아님을 밝힌다.
현재 서울에 있는 CCK는(물론 CCK 당자들에게는 예의에 어긋나는 말인 것을 십분 양해를 바라면서) 책 파는 서점이요 잡지 파는 잡지사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CCK라는 간판을 떼었으면 좋겠다. 몽매한 한국 교우들에게 「중앙협의회」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박아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명실상부한 중앙협의회가 있어 그 안에는 가톨릭 出版協會, 平信徒協會, 「매스콤」協會, 가톨릭영화, 신문, 언론 출판윤리協會 가톨릭 平信徒養成協會 가톨릭敎育者協會, 가톨릭醫師協會 순교자현양협회, 가톨릭學生協會, 가톨릭_人協會… 등의 여러 「스텦」을 두고 超敎區的으로 全國的인 활동을 하고 對外的으로는 한국가톨릭을 대변해야 할 것이다.
上記 中央協議會가 없었기 때문에 과거 한국 가톨릭의 침체와 부진상태를 紙面관계상 한 두건만 열거한다면 첫째 한국교회 출판문제이다. 가톨릭출판물을 통할하는 초교구적인 「스텦」이 없었기 때문에 한 곳에서만도 얼마든지 인쇄할 수 있는 것을 마치 출판경쟁이라도 하는 것철머 여기저기서 제가끔 막대한 출판비를 내고 있으며 더구나 외국서적 번역에 있어서도 한 작품을 둘 셋이 한꺼번에 손을 댓다가 그 중 어느 편이 먼저 활자화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오랜시간과 정력을 고스란히 소비하고 그 원고를 세상에 내어보지도 못한채 쓴 웃음을 짓고 묻어버린 일이 한 두건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 출판물이 아쉬운 이 판국에 손바닥만한 이 한국에서 우리 스스로가 이러한 「헨디캡」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언론 출판 영화 윤리 문제의 한 예로서도 지금 경향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신문소설 「계룡산」이 윤리적으로 좋지 않다는 여론이 가톨릭 안에서가 아니라 도덕이 부패했다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다. 그때 가톨릭에서는 무엇을 했던가? 그 뿐인가 우리 주변에는 「이웃돕기 운동」, 납북인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이 일어났지만 가톨릭은 여기에 대해 종래 일언반구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비죤」이 전연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잡지·신문 검열위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금이 되고 산상의 등불이 되라고 하신 그리스도 앞에 민망스럽기 그지 없다. __ 속에 감추어진 진주는 뜼이 없는 법이다. 가톨릭학교의 종교교육 문제도 그렇다. 좌왕우왕 갈피를 못잡고 있으며 평신도들의 교회참여와 사회참여 문제도 그렇다.
이번 공의회에서 불러 일으킨 세계적인 여론에 호응하여 우리 한국 평신도들도 꿈틀거리고 있다. 이것을 이끌어줄 평신도협회는 현실이 요구하는 절실한 문제이다. 따라서 공의회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한국 주교회의에서도 평신도 문제를 다룰 때는 평신자 대표를 참석시켜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평신도들에게도 그 길을 열어주는 것이 당연한 처사로 보고싶다.
가톨릭의 대외전교인 「매스·콤」 활동도 지리멸렬 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한 교구의 문제가 아니고 전국 가톨릭의 문제인만큼 주교회의에서만 성공을 볼 수 있는 문제들인 것 같다. 다음 超敎區的인 기구는 한국의 실정으로보아 서울 중앙에 자리잡아야겠고 이를 위해서는 초교구적으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서울에서만 해야한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고 지방교구에서는 서울로만 미루는 것도 잘못된 생각인 것 같다.
한국 사회의 여건으로 보아(물론 기형적인 사회임을 인정하지만) 모든 것이 서울 집중인 만큼 서울 가톨릭의 움직임은 곧 전국 가톨릭을 대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초교구적인 문제의 하나로서 사얼핏 보기에는 지엽적인 문제같지만 실은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로서 서울에 「성직자호텔」을 만드는 일이다. 하루 평균 십여명의 지방 성직자들이 상경한다고 한다. 그들은 서울에서 숙소난에 부닥친다. 그래도 호주머니가 두툼한 신부들은 「호텔」을 찾아들지만 주머니 사정이 불량한 신부들은 몇 번 시내 보좌신부들의 방을 넘나보다가는, 에라! 하고 찾아드는 곳이 싸구려 여관이다. 싸구려 여관의 분위기를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런 현실이므로 지방 각 교구와 각 수도회에서는 저마다 「서울 연락소」를 만들겠다고 동분서주하며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다. 이런 산발적인 연락소가 필요 없이 큰 「호텔」이 하나 있으면 그 안에 이것을 종합할 수 있고 또한 강습이다, 휴가다 해서 서울에 얼마동안 상주해야 하는 신부들도 이 「호텔」을 이용할 수 있고 집 없는 설움을 겪고 있는 군종신부들도 이것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 역시 한 교구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전국 주교회의에만 가능한 문제이며 여기에 경제 문제가 야기된다면 이번 주교회의를 계기로 해서 한국 주교님들의 공동 서명으로 교황청에 원조를 신청해 볼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운영에 있어서는 필자의 우견으로 시설만 갖춘 다음 어떤 수도회에 맡기면 되지 않을가 생각된다.
이번 주교회의는 초교구적인 기구를 조직 강화하는 등 새로운 「이니시아티브」가 있는 회합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당돌한 발언같은 느낌이 없지 않으나 평소에 생각한 바를 말해보았을 뿐이다.
朴道植(大邱 東村본당 임시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