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더 중대한 것을 보지 못하고 하찮은 일에 너무 관심을 두어 그 사건의 실마리를 잊어버리는 수가 허다히 많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한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오늘의 우리는 무엇보다 사건의 머리와 꼬리를 올바로 분간해야 할 것이다.
▲지난 24일 저녁에 라디오에서 울려나오는 「아나운서」의 구슬픈 소리! 20세기의 가장 위대했던 정치가이며 동시에 저술가인 윈스턴 처칠경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90 평생에 63년 동안의 의원생활을 통해 오늘의 영국을 이끌어온 그야말로 영국이 낳은 20세기의 큰 별이었다. 그의 90평생은 이제 지나간 하나의 역사과정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또 하나의 별을 잃었다. 우리도 영국 국민과 더불어 그의 서거를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슬픔에 가득찬 「아나운서」의 방송이 지나자 이튿날 국내 각 일간신문에는 주먹만큼한 활자로 「처칠」경의 서거를 보도했다. 신문지를 들자 시꺼먼 줄로 테를 두른 그의 사진을 앞에 놓고 무엇인지를 느끼는 것 같다. 『결국 죽고야 말았군!』 하나의 체념같은 소리다. 신문을 읽어가면서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큰 흥미거리가 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국 역사상 최대의 국장」이라든지 또는 「엘리자베드」 여왕이 장례식에 몸소 앞장을 선다든지 장지(葬地)는 어디이며 누가 조전(吊電)을 쳤느니 하는 문제인 것 같다.
▲교통사고가 일어나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죽음」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일으킨 사건 자체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다. 처칠경의 죽음이 보도되자 그가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역사에 대해선 사람들이 비상한 관심을 갖지만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선 아예 관심이 없다.
▲처칠경이 죽었다. 그는 왜 죽었을까? 권리가 없어 죽었느냐? 돈이 없어 수술을 못해 죽었느냐? 영국 「런던」시에 의학박사가 없어서 죽었느냐? 영국 천지에 그가 입원할 병원이 없었더냐? 아니다, 아니다. 영국을 호령하고 세계를 호령하던 그도 죽음이란 운명 앞에는 어쩔 수 없었다. 「죽음」과 「삶」의 한계는 무엇이며 죽음과 살므이 운명은 어디에 연유를 두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