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의 시정방침으로 지난 16일 국회에서 밝힌 박대통령의 연두교서를 보면 전체교서(全體敎書)의 거의 절반인 약 40%를 경제정책 설명에 충당했고, 또 65년을 「일하는 해」로 정하고 그 3대 목표를 「증산」 「수출」 「건설」에 둔다고 했다. 더구나 우리가 염원하는 자립에의 가장 중요한 첫 단계인 식량증산에 있어서 향후 3년, 즉 그의 임기 내에 「자급자족 달성」을 다짐하고 수출에 있어서는 금년도 목표액인 1억7천만 「달라」는 물론, 67년에는 3억 「달라」 목표도 능히 달성하여 「수입 수출」이 균형되리라고 낙관적인 예측을 하고 있다. 국가 장래를 위하여 경하스럽고 고무적인 전망이라 하겠다.
박대통령이 이처럼 경제성장을 위하여 주력하며 그 목표달성에 굳은 결의를 표명한 것도 「빈곤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다짐한 것이니 일언가파(一言可破)하면 국민이 다같이 「보다 더 잘 살기 위함」인 것이다. 교서에서 밝힌 국정제반, 특히 빈곤을 퇴치할 경제시책에 있어서만이라도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기를 희구하며 여하한 「시련」을 겪더라도 달성하여야만 하고 또 그 목표한 바가 1백%까지 달성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근사치(近似値)에까지는 도달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목표가 달성되는 날 빈곤이 퇴치되느냐?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3년 후에는 식량이 자급자족되어 굶는 국민이 없고 국민 소득이 현저히 상승되어 이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격양가(擊壤歌)」가 메아리치는 낙원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으리라. 3년 후 혹은 「식량 증산 7개년 계획」이 완수되는 그 날에도 빈곤은 빈곤대로 그 양상을 조금도 달리하지 않고 빈곤에 기인하는 모든 사회악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여전할 것이며 욕구불만에 폐쇄된 인간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불안은 오히려 더 우심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현대의 빈곤이 물질적 생존 조건에만 있지 않고, 빈곤 자체와는 특별한 관련 없는 또 하나의 빈곤, 즉 빈곤의식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민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의 빈곤이다. 문화민족이기 때문에 빈곤의식(貧困意識)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며 따라 사회악은 매일 새롭게 되풀이되는 것이다. 빈곤의식은 빈곤자로 하여금 인간과의 「콤뮤니케이션」에서 이탈된 나머지 고독감과 절망감에 빠뜨리게 하고 말기 때문에 물질적인 빈곤보다 오히려 중대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식은 전체 사회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윤택할수록 더욱더 강렬하게 빈곤을 감수(感受)하게 되며 더욱더 비참하게 절망감에 빠지는 계층을 낳게 마련이다.
물질적 빈곤만이라면 강력한 공공권력의 시책수행으로 해결될 날을 대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물질적 빈곤은 오히려 청빈이라고도 하여 일부 계층의 사회, 신심이 돈독한 종교인 혹은 수도자들은 인격연마와 수도의 방편으로 삼기도하고 적빈을 자랑으로 삼는 계층도 없지 않다. 박대통령이 교서결미(敎書結尾)에서 물질적 국민자본보다 정신적인 그것을 우위에 두고 진실과 정의를 강조역설한 것은 타당하며 환영을 받을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전술한 빈곤의식 퇴치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점에 오인(吾人)은 실망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빈곤퇴치전(貧困退治戰)의 전선은 넓고도 깊은 것이라 물질적인 고려만으로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
미국의 존슨대통령은 작년 연두교서에서 『빈곤에 대한 무조건 전쟁을 선언한다』고 했고 지난 20일에 거행한 취임식에서는 「초미(焦眉)의 급선무」는 「미국의 빈곤퇴치」라고 선포하고 「위대한 사회건설」을 다짐했다. 1948년 미국이 「外援(외원) 계획」 개시 이래 얼마나 많은 대외원조 자금을 지출해 왔으며 금년만 하더라도, 작년에 비해 1억 수천만 「달라」가 줄기는 했다고 하지마는 실로 33억 8천만 「달라」의 외원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있는 여유 있는 나라다. 「미국」이라 하면 「잘 사는 나라」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그 미국에도 「초미의 급선무」로 격퇴해야 할 빈곤이 있었던 것이다. 이 미국의 빈곤 역시 주위가 풍부하면 할수록 더 한층 비참해지는 빈곤의식 속에 절망을 안은채 고립되어 있는 사회계층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면 한국의 경제성장이 미국의 수준에 도달하는 날도 빈곤은 여전히 남아있으리라는 말이 된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해마다 국민소득률이 다소나마 상승하고 생활이 해마다 개선되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일 이것을 부인할 양이면 통계숫자는 차치하고라도 작금 양년(兩年) 서울거리에 고층건물이 우후죽순처럼 치솟고 명동의 거리가 연년세세 그 화미의 도를 높이고 있음을 보라. 그러나 국민은 그와 반비례로 날로 우심해가는 생활고를 호소하고 사회의 일부 계층은 침전(沈澱) 좌절(挫折) 절망의 도를 더하여 빈곤의식은 그 명료도(明瞭度)를 더욱 선명하게 할 뿐이다.
빈곤대책에 있어서 공공권력은 경제성장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된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거니와 고 요안 23세의 이대(二大) 회칙에서 강조한 것처럼 20세기 최대의 과제인 「인간가족 전체」에서 물질적 빈곤을 격파하는 과업에 매진해야 하겠다. 국민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가족」이요 「형제」가 절망 속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 형제애만이 인간가족을 빈곤의식에서 구하는 길이다.
공공권력은 경제적 진실, 정치적 진실보다 인간적 진실을 우위에 두는 시책상의 고려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나라에서 결핍된 것은 물질만이 아니다. 「사랑」이 결핍된 것이다. 인간과 인간과의 「콤뮤니케이션」이 소통되지 않는 곳 「형제애」가 외면된 곳에는 언제나 빈곤이 있는 법이다. 65년은 「일하는 해」인 동시에 「사랑하는 해」이기도 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