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바오로 6세가 첫 회칙 「그의 교회」를 발표한지 수주가 지났다. 각성과 쇄신을 촉구하고 세계와의 대화를 강조한 이 회칙대상에서 한국 가톨릭교회가 제외돼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이같은 것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는 곳이 우리나라 교회일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 정신태도로 이 회칙을 받아들일 것인가?
교황이 지향하는 현대세계에 대면한 교회의 모습은 그리스도 뜻하신 그대로 인류구원을 위한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이다. 환언하면 복음적 청빈과 사랑에 사는 교회이다. 그리하여 교황은 이 두 복음 덕을 교회쇄신의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교회의 모습은 바로 이것인가? 한국교회는 사실 그 자체로선 부유하지는 못하다. 비록 세평(世評)이 천주교회는 부자라고 할망정 실정은 빈곤이 이나라 생활상을 상징하고 있듯이 역시 같은 가난의 질고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가난이 곧 「청빈」은 아니다. 복음정신에의 한 승화(昇華)없이 가난이 「청빈」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대로 가난이요 불행이다.
한국교회는 과연 가난하다.
그러나 국부적인 경우를 제하고는 한국교회는 복음적 의미의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로 오늘 한국사회에 시현(示顯)되어 있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이는 반드시 교회건물 수도원 학교 병원 기타시설 등 교회모습을 물질적으로 표시하는 것들이 가난한 사회현실과 대조적일 만큼 훌륭하여서가 아니다.
또한 이는 오늘 점고하고 있는 비난 그대로 누구보다도 먼저 앞서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모습을 드러내야 할 성직층에 있어 오히려 반대로 사치와 안이에 흐르는 경향이 전무치 않아서도 아니다.
한국교회가 아직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는 보다 더 깊은 이유는 그 영성(靈性)의 결핍에 있다 진복팔단(眞福八端) 같은 그리스도교 정신의 진수라고 볼 수 있는 참신한 복음덕은 설교의 경우를 제하고는 현실생활에서 만나기는 너무나 힘들다 하면 과언일까?
물론 당위(當爲)와 현실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것은 상식이다. 철학자 키엘게골이 말했듯이 참된 그리스도자(者)는 오직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러나 이말은 우리의 복음적 영성결핍을 책하는 경고가 될 망정 무리의 불충신을 변호해주는 것은 아니다.
영성에 결핍된 우리의 정신이 그 반대되는 물질적 세속주의에 영향을 입을 것은 당연한 결과다. 흔히 듣게되는 『교회내에서도 돈없이 일할 수 없다.』는 관념을 위시하여 교히 발전이 마치 질과 정신여하를 가릴바 없이 숫적 증가와 양적(量的) 증대를 통한 세력과시인듯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반증하고 있다.
『돈 없이 일할 수 없다.』 이 말은 일편 타당도 하며 어쩌면 납득도 될 수 있는 말이다. 교회사업이라고 돈이 필요하지 않을리 없다.
교회성원인 우리 모두는 경제적으로도 최선을 다해 교회발전에 봉사할 의무를 지고 있다. 천주의 은혜로 받은 재물을 천주께 당신사업을 위하여 다시 바치는데 우리는 인색하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바로 복음적 청빈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돈없어 일할 수 없다는 관념은 그리스도교정신은 아니다. 더구나 복음전파에 성불성(成不成)이 그것에 좌우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활동이 정치사회단체활동과 질에 있어 다를바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교의 자원(資源)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여기 일하시는 이는 먼저 천주성신이다. 우리인간적인 물질적인 요소는 여기 다만 오구로 사용되고 또 협조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그같은 물질위주의 관념은 그리스도의 청빈과 사랑,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신에 대한 부정이며, 천주의 전능과 섭리를 그의 자비를, 그의 구원의 뜻을 우리부터 불신(不信)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얼마나 의식 무의식중 물질적 세속주의에 병들어 있는지 명시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교회발전을 영적성장에 있어 보다 물질적 세력과시에 치중하고 있는 양 인상을 주게 되었다. 교회는 먼저 내적인 것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자들이 얻는, 그들안에 새워지는 천주의 나타이다.
우리는 이 나라안에 어떠한 훌륭한 어떠한 권위있는 사업을 통하여서든지 우리자신의 세력 부식이나 그 확장을 위해있지 않다. 교회인 우리는 『세상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 구원을 위해 있다.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로서 이 민족을 빈곤과 죽음에서 구제하기 위한 십자가를 지고가는 것이 이나라 사회안에서 우리가 진 사명이다.
이제 9월이 왔다. 우리보다 앞서 이렇게 살아가신 순교선열들을 각별이 추념하는 이 복자성월을 맞으면서 교회의 각성과 쇄신을 촉구하는 교황 회칙에 대하는 우리의 정신태도는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다짐을 굳세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