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깐」 소식에 의하면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추기경들의 평소복(平素服)을 간소화시키는 결정을 내리셨다. 교황은 그 이유를 밝혀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반영시키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교회의 청빈덕이 이제까지 3「미터」 길이의 추기경들의 진홍색 명주옷을 1「미터」 혹은 그 이하로 줄였다고 해서 무엇 더 뚜렷이 반영될 것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교황 성부 역시 청빈덕을 그렇게 「미터」자(尺)로 재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청빈 덕은 말할 것도 없이 먼저 정신적인 것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것이다. 그것은 일체의 자기중심의 욕망을 보다 더 큰 사랑, 애주애인(愛主愛人)하는 정신으로 끊는데, 자아(自我)를 완전히 잊는데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물질적인 청빈 없이 정신적 청빈만을 말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오늘은 청빈허원을 하고 개인명의로 소유한 것이라고는 땅 한뼘도 돈 한푼도 없는 처지이나 의식주에는 거의 걱정 없을 정도로 보장돼 있다시피한 현실의 수도생활이 참된 청빈이라 할 수 있을까도 수덕신학적으로 심각히 문제돼있다.
▲『여호는 굴이 있고 공중에 새는 깃들인 것이 있으되 인자(人子)는 머리를 누일 곳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집도 절도 없이 가난의 극치를 산 이가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의 청빈은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물질적 가난 그 가난에서 받는 굶주림·헐벗음, 이 모든 것을 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따라야 할 제자들인 그리스도 신자들, 교회의 청빈이 이와 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물질생활 역시 가난할 뿐 아니라 이웃과 세계의 가난의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더 큰 사랑을 위해 자기를 끊을 줄 아는데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 오늘의 교회의 참된 청빈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T시(市) 한 외곽지대 판자촌이라고 할 수 있는 빈민굴 한 가운데 몇 분의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님들이 살고 있다. 이 수녀님들이 하는 일로서 외관상으로 크게 눈에 뜨이는 것은 없다. 학교도 병원도 경영치 않는다. 그저 집에서 공장에서 이웃에 가서 가난한 이들에 섞여 묵묵히 일할 뿐이다. 삶의 근심걱정 육신의 피로, 굶주림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이 분들의 갖아 큰 일이다. 그러나 이 분들을 방문할 때마다 여기 오늘의 교회, 가난하고 봉사하는 진정한 교회가 있다는 것을 더욱더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자는 진복자로다.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