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각하 옥에 갇힌 우리아들을 풀어주시오』 이 시대의 전설처럼 남을 이 애소는 지난 9일 한국기독교어머니회의 6·3사태 학생석방의 탄원이다. ▲벌써 스산한 가을바람이 이는 거리에 백발이 성성한 늙은 어머니와 통치마를 버선목이 나오도록 겅정하니 치켜입고 반소매 저고리의 참으로 멋없는 어머니(?)가 「프라카드」를 들고 나섰다. ▲하도 된변을 연달아 겪는 당국이라 이거도 웬 아낙네들의 극성이냐고 이들을 퇴거시키기에만 급급했다. 그러나 무용한 정쟁과 도탄에 빠진 민생고가 날로 현실부정의 냉담 냉소의 폐풍을 길러낸 이 사회에서 순수한 거의 무의식적 모성애의 발로는 오랫동안 잠든 애린(愛隣)의 정을 다시 눈뜨게 했음에 틀림없다. ▲옛적 불란서에 한 성이 적군에게 함락되자 적장은 성중의 부녀자만을 피난시키면서 힘닿는 한 그들의 재물을 몸에 지닐 것도 허락했다. 그러자 성문을 지키던 적병은 모두 아연질색, 여자들은 하니같이 장정 하나씩을 업고 성을 나가더란 것이다. 드디어 이들은 다시 합세하여 성을 탈환했다는 아야기가 있다. ▲참으로 여성의 애정(애국)의 연원(淵源)에서 발로된 용기가 위기에 처한 현실을 구한 역사적 사실은 허다하다. 자기의 아들을 인류구속의 제물로 바친 성모님은 여성의 사랑의 근원적인 표상이 아닌가. 인간이 어머니 가슴에 영원한 향수를 잊을 수 없다면, 이는 타락한 인류가 최후로 돌아갈 어머니인 교회가 바로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게 아닐까. 진정 이런 난국에서 종래까지 별 흔적없는 우리교회여성들의 사회구제의 사명감과 나아가 실천적 조직활동이 아쉽다. ▲비단 헐벗고 주림만이 우리가 지닌 비극의 전부일까. 그것은 오히려 이웃이야 굶든 벗든 오불관언으로 자기치마 둘레의 제식구만 살찌면 족한, 거기다 구령을 위해 부지런히 교회만 가면 다 되는 줄 아는 착오야말로 한심한 정경이다. 어느 종교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과심은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ㅊ너주님이 우리의 판독(判讀)을 재촉하는 현재 이 시간이다.』 ▲때아닌 폭우로 많은 동표가 참상을 겪고있다. 중추 가절, 푸짐한 진찬에 기꺼운 추석빔이 나도는 그 언저리, 어디엔가 철없는 어린 것들과 쓸쓸한 조식(粗食)을 앞에하고 목이 메는 우리의 형제는 없는가 살펴 봄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