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준 제목은 나의 개종기로 되어 있으나 나의 경우엔 개종이 아니라 입교기가 되겠다. 40대에 이르러 영세를 하기까지의 나의 신앙편력은 몇 마디의 과정이 있었다. 어린시절에 가졌던 동화적 신앙기, 2·30대를 통한 종교의혹의 시기, 40대에 이르러 종교 귀의에 이르기까지의 세 단계를 가진 셈이다.
나의 동화적인 신앙시대는 일찌기 양친께서 이주한 원산에서부터 시작됐다.
그곳에서 야외 사생을 하는 아버질 따라 성당의 웅장한 종각 앞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어린 가슴에 무한한 꿈을 길러준 곳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 신부님들이 많은 그곳 성당은 바로 한 폭으이 그림같았고, 대소의 종이 5·6개 달려 있는 커다란 종각과 그것을 싸고 뒤로는 우거진 숲, 잔디를 끼고 언덕을 꼬불꼬불 내려온 하이얀 길, 나는 그 종각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빨갛게 타오르는 석양을 뒤로 「시르엘」처럼 우뚝 솟은 종각을 바라보며 무한한 행복감에 젖었었다.
부활절의 의식이 잔디의 꼬불길을 신비에 싸여 내려왔다. 「크리스마스」엔 대소의 종들이 모두 울려퍼졌다. 그 여운은 오색영롱한 무지개처럼 귓전에서 가슴으로 신비에 싸인 감동을 주었다. 텅 빈 성당 속에 동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사렴 없는 묵상을 하던 시절을 나의 동화적인 신앙기로 보고싶다.
흔히 청년기에 가질 수 있는 사고방식일는지 모르지만, 자기를 과신한 나머지 절대의 위치에 있는 천주를 느끼지 못하고 종교를 현실사회에 합리화 시키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의 「휴메니스트」이다. 그의 주장은 「휴메니즘」이다. 그를 한 세대의 위대한 사상가로서 그 사상으로 인하여 희생당한 것으로 보았다. 이리하여 나의 청년기는 종교에 대한 불신 아닌 의혹의 시기로 볼 수 있겠다.
6·25 동란은 나의 생애에 있어서 확고한 분계선을 이루어 주었다. 여태까지의 잔잔한 호수와도 같던 나의 반생이 동란의 격동 속에 수차의 사경을 넘게한 체험 속에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를 안 것이다.
몸을 가누지 못할만치 실의에 차 있었다.
현실 사회가 몸서리치도록 싫었다. 나는 성직자가 되고싶은 심정이었으나 혜화동 교회 앞뜰에서 어떤 이름 모를 미국 신부님 앞에 섰을 때 그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함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구령의 행로를 시작했다. 치밀한 「콤마」 이하 및 천분의 1이란 숫자를 계산하는 과학의 세계에서도 미지수가 있다. 여기에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존엄한 영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이 영의 세계에의 인식에 도달하기까지는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노력해도 실현될지 또한 미지수이다.
10여 년이란 세월을 예비함으로써 위의 과제를 충실히 생각하고 생각해 온 나머지 신앙의 초년병으로 영의 세계로의 행진을 시작했던 것이다.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속세에서 천당 영복에 이르는 길까지-
이호섭(숙대 음악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