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사(修人事) 끝에 상대방이 묻는다. 『네 그러세요 그럼 신문사에선 무얼 하십니까?』 『네, 교정을 맡고 있어요』 대답하는 자신도 어쩐지 좀 떨떠름하고 자격지심일까? 상대방도 그만 좀 대견해하지 않는 눈치여서 장히 속이 언잖아진다.
이 교정이라는 심오(?)하고도 겸손한 직업은 초보자에겔수록 정말 쉽고도 대수롭잖은 일일는지 모른다. 허지만 5년이란 교정 끝에 그게 섣불리 자신 있게 나설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인제 인식했다고 고백한다면 나 자신 어떤 지능적인 저열을 너무 솔직히 털어놓는게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지만 이 방면의 오랜 경험자와 의견 절충을 할 기회가 없이 말하게 된 것이 유감이지만 나로선 사실이다. 나는 처음부터 어떤 선임자가 있어서 그에게 견습을 받은게 아니고 처음부터 혼자 습득해왔으니, 더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교정이란 한 마디로 말해 『다 알고 들어가서, 할수록 몰라지는 것』, 이런 수수께끼 같은 작업이다. 도대체 원고와 그 원고대로 활자화된 것의 단순한 대조가 무엇이 그리 어려운가 할 것이다. 사실이다. 허지만 정자(正字)에다 정확한 철자법에다정확한 문장이래도 교정은 가끔가다 미쳐 상상도 못한 착오의 함정에 떨어지는 수가 있다. 하물며 악필에다 자가류의 독선적인 문체(장)도 없다할 수 없다. 미숙한 교정자에겔수록 「미스」란 어떤 의식적으로 도전해오는 대결자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교정이란 단순한 무감정한 사실적(寫實的)이고 기계적인 작업만이 아니다.
그 「미스」는 온갖 교묘한 수단을 써서 잠적(潛跡)해 있다가 이제 더 손쓸 수 없는 인쇄완료 단계에 와서 여봐란듯이 『톡』 튀어나오는 식으로 말이다. 완전히 사실적(寫實的)으로만 원고를 정확히 활자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교정이 요구하는 초보적인 기능이다. 어떤 필자는 잠언(箴言)이란 단어를 「함언」이라고 표기하는 수도 있으니까(그렇다고 이 교정자가 이 事實만 가지고 필자보다 유식하다고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착오다) 또 한 가지 예로 「自己」란 「己」자와 「乙巳」란 巳자가 다르다. 아마 좀 소심한 필자는 이 세 단어를 다 써야할 경우 요주의(要注意)란 주석을 달아올 것이다. 이런 한자(漢字)의 마력(魔力)이란 부지기수다. 한 번은 「성모의 전능」으로 나왔다. 바로 이건 글자 하나로 교리의 전복이다. 그 필자가 이따위 교리무식으로 무얼하느냐고 호통쳤을 때 별 수 없이 당하는 수밖에. 아닌게 아니라 교리를 몰라서도 당연히 저지를 「미스」지만 누가 「大統領」을 몰라서 「太統領」이라 했겠는가. 나의 경우 기억력이 없어서 한 단어를 거의 사전 수십번을 뒤졌어도 여전히 잊어버린다. 그래서 어떤 유식한 사람은 교정자의 자식은 그의 지식이 아니라 사전 속의 지식이라고 단정한다.(그건 정말 어떤 의미로 사실이다) 그래서 마땅히 사전에 따라야 할 말도 그런 종류의 선입관을 갖는 필자에게 『사전에는 이런데요』하면 『공자나 엘리올가 다 사전에 있는줄 아시오』라고 면박을 준다.
이쯤되면 교정자는 참으로 지식 이전의 활자와 원고를 견주어 보는 한갖 기술공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극히 드문 특별한 경우, 또한 그것은 극히 중대한 경우에 대비해서 교정자는 원칙을 무시한 파격적인(개성적인) 혹은 의식적인 「오류」를 멋모르고 고치려는 만용을 모면할 수 있는 지적인 바탕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거의 창의력 조차 필요한 언어·문장의 「뉴앙스」를 감득하고 필자의 의도를 직감할 수 있는 「센스」와 이해력 같은 것이다. 교정자가 어떤 글의 내용이나 문장에 대해(정도 문제가 있지만) 이해 없이 맹목적으론 그야말로 위험천만이다.
최초 거의 일년 가까이 나는 집에 돌아가 자리에 누우면 몽롱한 의식 속에서 온 천정이 교정지로 화하고 붉은 철필로 끝없이 활자를 그어내어 고치고 고친다. 피곤할 땐 이 작업이 거의 밤새도록 계속되는 수가 있다. 정전(停電)된 사무실 안 11시가 되도록 촛불을 켜놓고 활자 자국으로 울퉁불퉁한 잉크에 시꺼멓게 흐린 대교지(大校紙)를 펴놓으면 눈앞이 자꾸만 흐린다. 밤이 늦고 피곤한 탓만일까? 걷잡을 수 없이 후둑후둑 지는 영롱한 불빛.
지난날 내가 가장 죄스럽고 또 잊어버릴 수 없는 「미스」 한 가지가 있다. 평소 존경하는 모 중견 시인의 산문 중에 「交_」이란 단어가 「交勸」이라고 잘못된 것을 그대로 놓친 것이다.(이 일엔 나만의 책임이 아닌 교정에 있어 흔히 있는 말 못할 변명이 있지만 참을 수밖에) 당시 논설위원이시던 모 교수님이 오셔서 난처해 하시던 표정이라니….
이보다 더한 어처구니 없는 실례(失禮)가 어찌 이뿐이랴. 남의 눈에 티를 보면서 자신의 눈에 대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성경 말씀이 있다. 교정이란 자신의 눈에 대들보만한 무식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아무려면 교정이란 그 자체만으로는 집필할 수 있는 능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고 천장지차의 능력이다) 역시 남의 눈의 티도 정확히 가려낼 수 있는 능력 또한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미스」는 비록 티처럼 작으나 어떤 땐 그 글 자체에 치명적인 오명을 끼칠 수 있는 오점을 제거함으로써 그 글은 당연한 것이 되게할 뿐 아무런 공(?)도 드러나지 않는 것이 교정이다.
글에 있어 교정은 실로 정확히 함으로써 여자의 숨은 내조(內助)와 같고, 잘못 저지름으로써 남자에게 치욕을 끼치는 악처(惡妻)와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L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