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不幸한 中의 한 사람인 내가 60이 넘은 오늘에야 겨우 마음에 드는 宗敎를 信奉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은 實로 鈍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本文中에서)
오랫동안 不幸한 社會環境下에서 살아온 韓國사람인 우리들이 60年以上을 지내온 過去를 돌이켜 본다면 누나 없이 어두운 感悔가 늘 앞장을 서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日政下에 눌리고 過政下에 不安과 斷續된 社會的 · 政治的 混迷 六·二五事變 骨肉의 生_ 모두 슬픈 일이 접종되었다.
이같은 處地에서였기에 살아간다는 事實속에서 아무 內容이 없이 지냈다 한들 대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整頓과 發展이 없는 참으로 氣막히는 이 오랜 歲月을 보내면서 數十年을 보낸 이 땅의 모든 人間이 到底히 幸福했을 理由는 없다. 이 不幸한 中의 한사람인 내가 60이 넘은 오늘에야 겨우 마음에 드는 宗敎를 信奉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은 實로 鈍하기 짝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릴 때로부터 한 50살 되기까지 宗敎라고 보는 여러 敎會에 다녀본 일이 있다. 어려서 待天敎라는데에를 동무들과 나가보았다. 약간 철이 들어서 學友들과 같이 監理敎에도 가끔 나갔다. 農村에서 살 때에 權에 못이겨 長老敎라는 데에도 나가보았다. 專門學校에서 敎員 노릇 할 때에 어머니 喪을 當할때부터는 한 2個年 佛敎的인 行事에 參加한 일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行動은 全部가 그때 그때의 避하지 못할 便宣的인 그리고 一種의 社交的인 것이었음이 分明하다. 自己自身이 苦干의 覺悟를 가지고 聖堂에 나가기를 始作한 것은 滿 60세가 되었을 때다.
平凡한 한 사람이 年齒가 들어서 自己行程에 대하여 期待가 없어지고 希望을 잃었을 때에 비로소 生覺 키우게 되는 것이 宗敎에의 歸依라고 하는 事實은 書冊으로써 읽은 일이 있듯이나 亦是 이와같은 心情에서 나온 行動이었음이 分明하다. 따라서 이 行爲가 斜廊에 선 한 弱한 人間의 마지막 自己保全이라고도 解釋되었다.
그러기에 이때부터 自身이 가톨릭 敎人이 되었다고 남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何必 가톨릭을 擇하였는가? 여기에는 當時에 느끼고 있던 몇가지 理由가 있다.
그것은 내가 過去에 經驗한 바 없는 敎인 同時에 平日에 내가 隱然히 尊敬하던 몇분의 先輩가 數10年間 信奉하던 信敎를 勇敢히 한 事實을 注目하였기 때문이다.
또 新敎에서와 같이 强勸하지 않고 宗派가 없는 것이나 敎會內에서 苟且히 치켜세우거나 또는 내려 깎는 일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聖堂에 다니기 시작한 後에 내 身邊에는 적지 아니한 變化가 發生하였다.
그것은 내가 忠北大學의 學長으로서 約1個年間 있다가 軍事革命으로 해서 자리를 물러나기까지 問題 많은 이 大學의 同僚들이나 學生들이나 至於 이 地方有志들이 한결같이 나를 아껴주고 내 處地에 同情해줄 뿐만 아니라 나 自身의 前途 特히 앞으로 生計가 事實上 漠然했음에도 不拘하고 여려번 親知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_實한 努力을 傾注하여준 事實이다.
그분들은 決코 가톨릭 敎友가 아니다.
또 내가 가톨릭에 入敎했기 때문이라고 믿을 根據도 없다.
過去에 지은 罪過를 곰곰히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 여러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느 ㄴ것이 무척 도마운 일이며 아직도 무엇인가 해야할 일이 었어 그것을 꼭 시켜보려는 天主님의 啓示인지도 모르겠다.
自 幼年時期부터 農學을 공부하였으되 오늘날까지 알아내고 또 알릴 수 있는 것은 그 基礎的인 面에서는 果然 거대한 發達을 보았지만 生産面에서는 未開地가 許多하다는 事實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基本條件의 결함이 많은 나라에서는 廣範圍한 國土의 保存을 위한 造林과 耕地整理와 水利事業이 先行되어야만 問題가 풀려 갈 것이다.
歷史的 痼病인 早災와 水害에 對處하기 위한 當面한 施策 등이 如何히 周到하다 하더라도 結局 그때뿐이다.
50年이나 한가지 길에 從事하였다는 내가 겨우 이것밖에 알아낸 일이 없다는 自身이 무척 딱히기도 하다마는 根本이 不完全하고서야 健全한 積極的인 農學原理가 作用할 道理가 없다. 그리고 나는 지금 敎人의 햇병아리지만 우리나라 農村사람들이 좀 더 종교적인 信念을 가지고 좀 더 團結하였으면 나라의 運命이 더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事實 너무도 늦은 哀悟의 想念이다. 何如間 나는 나대로 조금씩이나마 自身을 發見하고 있으니 심히 다행한 일이다. 이 心境의 由來는 필경 나를 도와주고 있는 내 주위로부터 받은 過分한 處遇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와같은 일들을 내 존경하는 C先生에게 고백할 機會가 있었더라면 그분은 必然코 그것은 分明 天主님의 거룩하신 은총이라고 斷定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肉身은 벌써 여기 계시지 않고 또 내가 아직도 그렇게 느껴 내지를 못하는 것은 믿음이 얕은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나의 가장 가까운 여러사람들 부터 하루라도 빨리 天主님을 믿는 일이다.
1964년 7월 8일
筆者略歷
1900年 서울서 出生
1920年 水原高農 卒業
1945년 水原農大 敎授
1961年 忠北大學長
1962年寒國 韓國農藥會社 顧問
池泳鱗